지금부터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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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와글와글 북적북적. 극장 로비에 관객들이 많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극장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곧이어 극장 문이 열리고, 관객들은 저마다의 좌석 티켓을 들고 입장한다. 극장 안은 소란스럽지만, 오늘 상영될 영화를 기다리는 이들의 눈빛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이윽고 극장 내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만 빛이 스며든다. 스포트라이트가 그곳에만 쏟아진다. 마치 은하수를 가로지르며 넘실거리는 별빛처럼.


모두들 숨죽이며 정면만 뚫어져라 응시한다. 과연 어떠한 영화가 상영될까. 오늘의 영화는 제목도 공지되지 않았다. 블라인드 상영인 것이다. 제목도, 내용도, 등장인물도 공지되지 않은 상영. 첫 화면이 올랐다. 누군가 등장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렇다. 한 편의 영화는 한 명의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를 쓰면 대하 장편소설 10권짜리도 쓸 수 있을 걸.” 물론 쓰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는 남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경험이 얽히고설켜 있다. 감히 그 경험의 깊이를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경험이 하나둘 쌓여감으로써 ‘나’라는 사람이 완성되어 간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완성은 죽음 직전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경험들을 하고 하다가 결국 죽음까지 경험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숱한 인간의 경험이 쌓임으로써 거대한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소수인 리더의 역사만 공부해왔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는 민초의 역사로 만들어져 간다. 민초의 피, 땀, 눈물, 절규들을 담아낸 경험들이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세종대왕을 떠올려보자. 훈민정음은 단순히 혼자서 발명하신 것이 아닐 것이다. 곁에서 도와준, 우리는 알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사용하게 된 것도 백성들이 아니겠는가. 한 명 한 명의 경험담이 모여서 장점과 단점이 드러났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사용 중에 수정 보완되었을 것이다.


백성은 마구 짓밟아도 티도 나지 않는 잡초 한 줄기 정도로 치부될지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그들의 삶은 다양하고 아름답고 감사하다. 더불어 그들 한 명 한 명의 삶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 같은 삶이요, 그러다 보면 결국 내 영화의 주인공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만의 스토리로 그만의 영화가 한 편, 아니 여러 편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경험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주춧돌이자 디딤돌이기에 중요하다.



바로 당신이니까


나의 경험들을 떠올려본다. 즐거웠던 경험도 있었을 것이요, 그러지 못하고 감추고만 싶은 경험도 숱하게 넘쳐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앉아 글을 쓰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뻐꾸기 소리가 들려온다. “뻐꾹, 뻐꾹.” 그 소리를 들으며 글 한 편을 이렇게 써내려간다. 더불어 참새소리가 “짹짹짹.” 들려오고, 까치소리도 “깍깍깍.” 울려 퍼진다.


푸르른 숲속 장면이 네모반듯한 창에 채색되어 있으니 한 폭의 캔버스에 그려진 명화 같기만 하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플 때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힐링 타임이 따로 없다. 좋기만 하여라. 산들바람에 살랑이는, 거대한 나뭇가지에 붙은 나뭇잎을 바라만 보아도 역시 좋다.


이렇듯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지는 경험이라 할지도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리고 한 사람의 세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세포들이 모여야 한 사람이 이루어지듯이 말이다.


영국의 비평가 겸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험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다만 학비가 비쌀 따름이다.’ 스페인의 철학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을 맡기지 마라’라고 주창했다. 신교학자 로저 아샴은 ‘경험으로 사는 것은 값비싼 지혜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들의 명언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만큼 한 사람을 창조하고, 이루어내는 데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순간 순간이 경험임에도 분명하다. 그러니 무엇을 경험할지라도 그러한 경험에 감사하고 경험을 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사기를 당해 돈을 잃었던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돈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말 그대로 값비싼 지혜를 얻었던 것이다. 일적인 문제로 누군가와 다투었을 때도 귀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순발력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러니, 많이 경험하고 많이 아파하고 많이 이해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처럼 고지식해 보이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으련다. 다만 그냥 지금 이 순간 겪고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속에 잘 품어둔다면 훗날 분명 그러한 경험 중에서 하나를 쏙 꺼내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모든 경험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경험들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가는 당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여하고 싶다. 한 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있는 당신, 아카데미 감독상을 주련다. 한 편의 영화를 써내려간 당신, 아카데미 각본상을 선사하련다. 한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활동하고 있는 당신,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아 마땅하다.


당신의 삶은 그러고 보니 영화 <기생충>보다 훨씬 창의적이며, 값지고, 멋지다. 당신만의 이야기가 이렇게 대단한 것인지 진즉에 알아야 한다. 바로 당신이니까.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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