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이 텅 빈 버스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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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외로울 때마다 들여다보는 시가 있다. 정호승 시인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는 시구를 볼 때마다 강력한 진공청소기로 막혀 있던 부분을 뻥 뚫어주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시를 읽을수록 외로움이 더욱 켜켜이 쌓여가는 기분도 든다. 수십 억 사람들로 둘러싸여서 복작복작 정신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데 왜 외로움은 더 늘어가고, 깊어가고, 넓어지는 것일까.


사전에는 외로움을 이렇게 정의한다.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 그런데 분명 그 홀로 되었다는 것이 신체적 거리감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리라. 현대사회를 부유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외롭다’라고 숱하게 말한다. 낯선 환경에 남겨져 그 상황에 적응해야 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고 보통 알려져 있지만 그것만이 아닌 것이다.


‘하나’를 뜻하는 ‘외’와 ‘그러함’ 또는 ‘그럴 만함’을 뜻하는 ‘로움’이 합쳐진 단어. 내성적인 사람들은 타인과 어울리기보다 홀로 있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중에도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고독을 털어놓는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주위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고 느꼈을 때 뇌는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미국 시카고대 신경과학자 존 카치오포 교수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도록 진화했으며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이 서로 협력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에밀 뒤르켐은 외로움을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무능력 혹은 싫어함으로 보았다.


20세기 전반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인 실존주의. 이 실존주의 학파는 외로움을 인간이 되어가는 본질로 분석한다. 인간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홀로 당도하여 분리된 인격으로서 홀로 생을 여행하다가 결국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학자이자 작가 장 폴 사르트르는 의미 있는 삶을 갈망하는 의식과 우주에서 고립되고 무가치함 사이의 모순 때문에 인간 조건의 근본적인 요소라는 관점에서 인식론적 외로움을 주장하였다. 인간은 타인과 우주와 연결되어 활동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는데 이런 과정이 끊어진 기분이 외로움이라고 본 것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 아니겠나


외로움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찾다보니 철학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살짝 머리가 아프다는 뜻이다. 이 글 앞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뇌가 통증을 느낀다고 말하였는데 외로움에 대한 이유를 찾다보니 그 통증이 배가되는 느낌이다.


이토록 철학자들은 외로움의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결론을 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분명 명확한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더불어 그것 자체를 창의성을 발현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이들도 많았다. 괴테 또한 영감이란 외로울 때만 가능한 것이다, 라고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20대 시절에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사랑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먹이를 찾아 떠나는 외로운 한 마리 하이에나처럼 사방을 어슬렁거렸던 것이다. 급하게 마주친 사랑은 금방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외롭다는 절규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하이에나 본능이 다시금 튀어나왔고, 역시나 사랑은 스쳐 지나갔다.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쉽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 지적을 했지만 내 사랑은 누구도 진지했고 어느 사랑보다 아름다웠다. 그랬기 때문에 사랑의 아픔은 더욱 컸고, 외로움은 더없이 짙어져만 갔다. 앞선 사랑을 잊히려면 사랑했던 시간의 두 배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외로움은 사랑에서만 솟아오른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라떼는 말이야’ IMF라는 거대한 위기가 버티고 있었다.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마다 내가 참으로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꼰대 같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다. 졸업을 하기가 두려웠고, 아니 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선배들은 언제나 후배들을 챙기고 밥도 잘 사주고 그럴 줄만 알았는데, 밥을 사주는 선배들은 사라져버렸다. 다들 자신 몸 하나 건사하기에 바빠졌기 때문이다. 졸업만 하면 취업은 이제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캠퍼스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된 첫 세대가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와 같이 다니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더치페이라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같이 다니지 않으려 했다. 그동안 꿈꾸어왔던 대학 시절의 낭만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그 낭만을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했다.


그렇게 홀로 외로움을 삭혀나가고, 그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친구들은 그렇게 학교를 떠났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삶을 떠나기도 했다. 죽을 만큼의 외로움은 그때부터 쌓여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싫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외로움이 쌓이고 쌓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 적이 있다. 버스가 자주 들고나는 정류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버스가 오지 않았다. ‘사고가 났나.’ 이상하게 곁에 사람들도 모이지 않았다. 시골 버스정류장, 30분에 한 대 겨우 오는, 그것도 배차시간이 늘 일정하지 않은 그런 버스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리운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냥 멀리 버스가 오는 방향만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그냥 때가 되면 오겠지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건 생각보다 조용한 주위의 고요함 때문이었다. 책을 읽을까 하다가 지금은 아날로그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CD플레이어를 꺼냈다. 좋아하는 팝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팝 발라드 모음집이었던가.


음악이 흐르고,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내 귀를 마시멜로처럼 녹여버리는 노래의 멜로디에 맞추어 리듬을 타듯 걷고 있었다. 영화의 한 프레임에 들어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외롭게도 텅 빈 버스정류장에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 다시금 멀리 버스가 와야 할 방향으로 고개를 빼꼼히 쭉 내밀고서 두리번거렸다. ‘사고가 났나.’ 또 생각했다. 음악과 함께 나만의 시간을 다시금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랬다. 우리 삶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그리고 홀로 남겨진 순간, 어김없이 찾아오는 외로움. 그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던 나. 혹시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외로움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외로움을 나누어야 할지도 모르는 누군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운 것일지도.


텅 빈 것까지는 아니어도 북적이지 않는 버스정류장을 볼 때마다 그때가 생각난다. 충분히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애쓰던 나의 모습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버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버스가 왔던가. 아니면 난 그냥 그 자리를 떠났던가. 왜 이렇게 기억이 나질 않지? 나이 탓을 하고 싶진 않은데. 외로움이 너무 쌓여 기억이 상실되어버린 것일까.


외로울 때는 이렇게 하세요, 라는 답변을 주고 싶진 않았다. 나 역시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충분히 외로워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게 외롭다가 자신만의 답을 찾아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정호승 시인이 한 줄로 남기지 않았던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글을 쓰는 지금도 너무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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