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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
1997년 겨울을 핫하게 달구었던 노래, 자우림의 <일탈>이다. 요즘 밀레니얼 세대에게 자우림이라는 밴드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모른다는 대답이 대부분일 것이다. 내 생각에도 <슈가맨>에 출연하더라도 100불을 다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긴 하다. 사실 10, 20대의 경우 <슈가맨>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 가수와 노래를 이해하고 불을 켜는 이유가 평소 가수와 노래를 알아서가 아니라 최근 유튜브의 놀라운 알고리즘 덕분에 가끔, 아니 종종 접하다 보니 그렇게 인지가 되어 있어서 불을 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노래가 당시 왜 그리도 핫했을까.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불리는 <쉬리>가 1999년에 개봉했다. 즉 이 말은 무엇인가 하니 다양성과 오락성을 바탕으로 하는 참신하고도 독창적인 문화가 국내에는 존재하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해외에서는 그러한 영화와 노래가 많아서 국내에서 접할 수 있었지만 자체적으로 그러한 문화는 요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자우림의 <일탈>은 놀라운 가사를 품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루하다고 해서 화끈한 일, 신나는 일을 찾다가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라니. 당시 이 파격적인 가사로 인해 PC통신은 (그렇다. 피식 하며 웃을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이 아니다. 전화선 모뎀으로 연결해 밤새 하다가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각 집마다 엄마에게 등짝을 맞아가던 청춘을 넘실거리게 했던 그 PC통신이다.) 밤새 핫한 토론의 장이 끊임없이 펼쳐지곤 했다. 이러한 가사를 써도 된다, 안 된다, 퇴폐적인 향락문화이다, 아티스트의 창작이다, 우리도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설 때가 되었다, 아직이다 같은 찬반 논란이 꽤나 거셌다.
그런데 나는 저 가사가 좋았다. 당당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하라는 그런 가사가 아니던가. 응어리 졌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에 없는 돈 털어서 테이프도 사고, CD도 사고, 자우림 팬클럽에 가입도 하고, 콘서트도 갔던 것이다.
당시에는 1997년이라 신도림 역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조차 없었지만, 훗날 서울에 정착하고서 신도림 역에 가보니 스트립쇼는커녕 지하철 타기도 힘들어서 내 공간을 조금이라도 확보하는 거 자체가 힘든데 스트립쇼는 무슨. 인천 또는 의정부에서 오는 1호선과 서울을 순환하는 2호선과 만나는 곳이라 서울 지하철 역 중에서 가장 붐비는 곳에서 그러한 일탈 자체는 꿈꿀 수도 없다. 좀 널찍한 곳으로 이동해서 시도해본다면 몰라도. 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생각만 해도 기분은 시원하다.
여하튼 그러한 가사가 전달하는 카타르시스를 나만 몰래 누리며 하루하루 내가 원하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대생이, 감히 공과대생이 뮤지컬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우선 가족의 반응은 어떨지 너무나도 예상 가능했지만, 친구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생각 이상으로 ‘그럴 줄 알았다’며 꽤나 격려해주는 분위기였다. 자신들은 그럴 용기가 없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이 자식들이 내가 뭘 하든 관심이 없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용기였다.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책임져야 할 용기’였던 것이다.
친구들은 자신의 또 다른 인생을 그려본 적도, 그려보지도 못했고 그에 따른 대가나 책임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대로 차분하게 살아가면 어떻게 될지 대충 계획을 세우고 머릿속에서 그려갈 수 있는데 완전히 180도 뒤바꾸는 인생은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응원은 해주는데, 자신 또한 그런 용기로 새 삶을 시작해보고 싶은데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용기를 내어 새로운 시작을 해보겠다는 나를 말리기는커녕 응원해준 것이었다. 그 응원을 받으며 결국 나는 부산에서 뮤지컬을 위한 기본 틀만 닦고서 서울로 올라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통장에는 달랑 10만 원 있었다. 어휴, 이후 고생은, 어휴, 생각만 해도 어휴, 더 이상 생각조차 하기 싫은, 어휴….
전공자들도 쉽지 않은 무대를 내가 감히 올라갈 수 있으려나. 그렇게 고민과 걱정 속에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귀퉁이 어딘가에 앉아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용기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랐다. 위풍당당했던 용기가 어느새 쪼그라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결국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어깨는 움츠러들고 고개는 자꾸 아래로 숙여져만 갔다. 발걸음은 터덜터덜.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이곳 마로니에 공원 어딘가에서 그렇게 절망하고 실망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버텨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배역을 따내고서 그동안 고생했던 것들에 대한 보상을 마음껏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배역을 따낸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긴 했다. 뉴스를 통해, 예능을 통해 공연예술의 처우와 현실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지만 첫 번째 관문을 지난 것만 해도 어디인가. 나도 그 관문을 어서 지나고 싶었다. 하지만 연줄도 없고, 백도 없고, 기본도 없이 혈혈단신 올라온 내게 기회가 주어질리 만무했다. 그래서 마로니에 공원에서 소리를 한 번 크게 질러 보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보고 있었고, 가는 길을 멈추고서 흠칫 이곳으로 향해 시선을 옮기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 말고도 저렇게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구나.’
‘역할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나 보네.’
‘참고 기다려보세요. 언젠가는 작은 역할이라도 주어집니다.’
그들의 생각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버린 듯 내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새겨 들어왔다. 나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비명을 질렀다. 그래, 그것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하고 싶다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정말 하고 싶다는. 제발 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작은 배역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무대에 너무 서고 싶어서 평탄한 삶을 버리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눈물과 비명이 뒤범벅이 된 그날 이후 다시금 마음먹었다. 결국 내 인생이니까, 내가 선택한 인생이니까 어떻게 돌릴 수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옛다, 받아라’ 하며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그렇게 하루하루 견뎌내고 참아내며 달려왔다. 때로는 걸어왔다. 가끔은 기어왔다. 더 가끔은 멈추기도 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나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