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중부 지역에 위치한 테베(Thebes)의 왕 라이우스(Laius)는 장차 태어날 왕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이후 아내이자 왕비인 이오카스테(Iocaste)가 아들을 잉태하자 라이우스 왕은 아들을 산에 갖다버린 후 죽게 하라고 명령하기에 이른다. 예언이자 운명 때문에 아이는 결국 산에 버려지는데 우연히 양치기가 아이를 발견하고 코린토스(Korinthos)의 폴리부스(Polybus) 왕에 바치게 된다.
이 아이가 바로 오이디푸스(Oedipus)인데,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자신의 고향인 코린토스를 떠나 우연히 갈림길에서 라이우스 왕이자 자신도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고야 만다. 하지만 누가 길을 먼저 지나갈 것인지를 놓고서 서로 다투다가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이자 왕을 죽이게 된다.
이 일이 있고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Sphinx)에게 가는데, 스핑크스는 테베로 가는 길을 막고 모든 여행자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문제를 풀면 통과하게 해주고 그러지 못하면 목숨을 앗아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문제를 풀게 되고 치욕을 견디지 못한 스핑크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를 감사하게 여긴 테베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도 모르는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진짜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근친상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신들은 분노하여 테베에 전염병을 퍼뜨리고, 라이우스 왕의 살해자를 찾으면 전염병을 거두겠다는 예언이 내려온다.
테베를 구하기 위해 범죄자를 찾아 애쓰던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살해자이자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오카스테는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며 오이디푸스는 옷을 조이는 데 쓰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러버리고 만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신화이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적으로 깊게 파고들면 끝도 없이 파고 내려가다가 지구 중심을 만날 것만 같은 이야기인지라 여기까지만 들려주고 끝내려 한다. 다만 이 신화를 굳이 들추어낸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조금 더 디테일하게 설명하자면 나의 아버지와 나의 관계에 대해 차분하게 카운슬링 받듯이 풀어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영조대왕과 사도세자, 러시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Bratya karamazovy)》, 아르헨티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엠마 순스(Emma Zunz)》, 독일의 헤르만 헤세(Herman Hesse)의 《데미안(Demian)》과 더불어 영화 <헐크(Hulk)> 속 아버지와 아들 또한 극단으로 치닫는 대립과 갈등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집안에서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한다. 소위 말하는 남성 DNA 때문에 서로 가정을 지키려고 본능적으로 견제하기 때문이래나 뭐래나. 물론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딸, 어머니와 아들 이야기도 나누면 좋겠지만,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늘 계륵처럼 따라다니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버지와의 어색함을 풀어내고자 애 많이 쓴다. 말로 툭 터놓는 것이 매번 어렵고 무겁게만 다가와서 이렇게 글로나마 아버지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젊은 아버지들이 자녀들과 오붓하게 잘도 지내고 오순도순 막내동생과 놀 듯 행복해하는 모습을 TV를 통해서건, 현실에서건 종종 본다. 하지만 ‘라떼는’ 달랐다. 우리 때는 달랐다. 아버지는 집이라는 울타리 바깥에만 계시면서 돈만 벌어오는 분, 새벽에 나가셨다가 모두가 자고 있는 한밤중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시끄럽게 하며 들어오는 분, 주말에는 잠만 주무시는 분 정도의 이미지가 강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해서 누구 하나 ‘아니요’라고 하진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두 번째 스물들의 아버지, 즉 세 번째 스물에서 3.5번째 스물 정도 되신 분들의 돌아가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으니까.
그만큼 아버지는 멀기만 한 존재였다. 엄마와는 전화 통화 속에서도 나름의 꽁냥꽁냥이 드러난다. 살가운 대화 너머로 웃음꽃이 피기도 한다. 대화 시작에 활짝 피었다가 마치고 나서도 여운을 드리우며 수화기 끝에 맺혀 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꽃이다. 오그라들어도 상관없을 꽃이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노력한다. 이전 책에 공식적으로 아버지와의 어색하기만 사이를 밝힌 이후 종종 지금은 어떤지에 대해 물어오는 분들이 계셔서, 그리고 그 안에서 아버지와 잘 지내겠다고 다짐한 나의 고백이 있었기에 노력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 아버지가 전화를 많이 하셨다. 내 책을 꼼꼼하게 다 읽으셨나 싶을 정도로. 딱히 대화를 나눌 주제가 메말라 있는데도 그냥 전화 진동이 자꾸 울렸다. 귀찮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받기 싫을 때가 많았다.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러다가 살짝, 정말 살짝, 조금, 진짜 조금 귀찮다며 화를 냈는데 그게 바로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관통한 화살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부산사나이, 과묵함의 대가인 아버지가 삐쳐버린 것이다. 그냥 그러고 넘어가면 될 줄 알았다. 아니면 전화를 다시 걸어서 죄송하다고 하면 되었을 텐데, 왜 그리도 질질 끌었는지. 나이 든 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달래지도 못한 내가 두고두고 지금도 원망스럽다.
이후 상황은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300페이지짜리 장편소설 한 권쯤은 나오는 분량이라 노벨문학상, 맨부커상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국내 문학상 정도는 문제없을 만하기에 그냥 이유 없이 생략하기로 한다. 아니, 사실은 이러저러한 상황 설명이 나를 민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은 내가 나쁜 아들이었으니까. 반성했다. 죄송했다. 사과했다.
그 이후로 종종 먼저 전화한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약간의 죄책감을 담아서 살갑게 첫 인사를 건넨다. 죄책감도 조금씩 깎아 내려간다. 그런데 아휴, 왜 그렇게 서로 할 말이 없는지. 그래도 전화한다. 해야 한다. 10초 만에 전화를 끊더라도 그냥 한다. 고향 좀 내려와서 얼굴 좀 보자고 100번은 말하셨던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내려가는 게 부담이 되고 어렵기만 하던지. ‘피붙이라 더 어렵기만 한 것이려나’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잘도 갖다 붙인다. 바로 내가.
아버지는 자꾸 맛있는 걸 사주신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엄연하게 달라서 늘 어긋나고 삐끗한다. 또 아버지는 자꾸 같이 산에 바람 쐬러 가자고 하시는데 난 산에 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드넓은 바다가 좋다. 가슴도 뻥 뚫리는 기분이라.
아무튼, 드디어, 여기에서 모든 논란과 어색함을 종결짓고자 한다. 잘 들어보시라. ‘나는 아버지가 좋다. 우리, 아니 나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연예할 때는 입안에 침이 마르도록 사랑한다는 표현이 쉬웠는데, 그것도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오글거리게 외치기도 했는데 드디어 아버지에게는 처음으로 말해본다. “아버지, 아니 아빠, 사랑합니더.” 아, 더는 못 하겠다. 여기까지만.
첫 번째 스물이든, 두 번째 스물이든 우리 모두 나이 상관없이 아버지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꼬옥 안아드렸으면 한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화들짝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포옹이라는 스킨십은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놀라운 힘이 있으니까.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왔다. 그 쉬운 말을 아직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나를 원망하면서 말이다. 첫 번째 스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를 응원하고 싶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스스로를 원망하지 말고 하고 싶었던 그 한마디만 딱 하면 된다고. 그것도 배시시 웃으면서 하면 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