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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Feb 22. 2018

권위를 뛰어넘어 실용적으로 다스리다

실용_ Queen Elizabeth Ⅰ

“나는 잉글랜드와 결혼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국왕이자 지금까지 8명의 여왕 중 최고로 칭송받아온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Ⅰ, 1533~1603)가 남긴 말이다. 그가 왕위에 즉위했을 당시 잉글랜드는 세계를 호령하던 무적함대의 스페인과 유럽의 신흥강자로 떠오른 프랑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작은 섬나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잉글랜드가 국력을 키워야만 더 이상 변두리 국가 취급을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더불어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다루기 쉬운 나라로 평가절하당하지 않으리라는 진실을.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는 오직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신념하에 스페인의 필레페 2세와 프랑스의 앙리 2세의 청혼을 물리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정에는 그의 실용적인 외교노선이라는 비밀이 숨어 있기도 하다. 두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다른 나라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잉글랜드가 남편으로 선택하는 나라의 과도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딜레마마저 존재했기에 그는 국가와 왕권의 안정을 위해 독신을 선택했던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삶은 포기하고, 왕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그의 똑부러진 판단이 잉글랜드의 미래에 작은 등불이 되어준 것은 아닐까.     


가난한 섬나라를 유연하게 경영하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과 같은 표현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대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탁월한 리더십이 존재했기에 빅토리아 여왕의 ‘황금시대’가 가능했다고 칭송한다.

 

후세는 그를 위대한 군주로 평가한다. 하지만 태어났을 당시 그는 공주다운 대접도 받지 못하고 부모의 따뜻한 사랑조차 누리지 못한 불운한 운명이었다. 25세에 잉글랜드 여왕으로 등극했을 때도 눈앞에는 난제들만 산적해 있었다. 텅 빈 국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 스페인의 노골적인 간섭, 반대파 귀족들, 스코틀랜드의 견제와 아일랜드의 독립 움직임, 참모진의 부재 등 그는 넓고 어두운 궁전에 갇힌 인형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서두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정치적 혹은 개인적 원한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지 않았다. 자신은 신교도였지만 종교 간의 분쟁을 깊게 만들지도 않았다.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서는 구제법을 제정했으며, 의회 및 귀족과는 유연하고도 우아한 방법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더불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는 해적을 기용하는 탁월함을 선보여 군사력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588년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던 잉글랜드 병사들을 격려하고자 틸버리에서 펼친 연설은 역사를 뒤바꾼 명연설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내가 연약한 여자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왕의 심장과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잉글랜드 왕의 심장과 위를 말입니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철저히 계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상황을 비추어본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엘리자베스 1세가 살아야 했고, 잉글랜드 국민이 생존해야 했으며, 나라를 굳건히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 통치기간 동안 국력 강화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잉글랜드 국민 문화의 황금기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의 이야기를 패러디해도 허용될 만큼 문학적 자유로움이 꽃을 피웠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을 위시한 철학자들의 사상이 번영을 이루었다. 이처럼 잉글랜드는 지혜롭고도 유연한 통치자, 엘리자베스 1세를 통해 세계 최대 강대국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장례 행렬


Do You Know?

올림픽은 전 세계의 화합과 인류애를 위한 스포츠 축제이다. 반면 월드컵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해 가능한 스포츠 축제라 할 수 있다. 오직 축구라고 하는 단일 종목만으로 이루어지며, 북미 지역은 축구 자체에 큰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세계는 올림픽보다 월드컵에 더욱 열광한다. 그렇다면 축구에는 어떠한 매력이 존재하기에 팬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일까. 


덴마크의 폭정 하에 학대를 받아왔던 영국인들이 덴마크 군을 철퇴시킨 후 전쟁터에서 패잔병들의 두개골을 차며 승전을 축하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축구의 기원. 1863년 영국 축구협회가 생겨나면서 축구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왜 유독 축구의 인기가 영국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을까. 13세기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제후들의 반란이 대헌장, 즉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제정으로 이어졌는데, ‘공동체의 권리’를 대의명분으로 삼던 이들은 협력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수 있었기 때문에 끈끈한 전우애로 이어졌던 것이다. 


개인기를 중요시하는 야구와 달리, 11명이 한 명인 듯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점수를 낼 수 있는 경기가 바로 축구이므로 선수뿐 아니라 팬들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 펍(pub)과 같은 장소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얼싸안으며 응원할 수 있는 마법의 스포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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