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미운 오리 새끼에서 일상의 쉼표가 되기까지

취미는 취미 수집

by Jeremy

나는 언제나 부정한다. 스마트폰 중독은 아니라고. 늘 습관처럼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써 중독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또 구시렁거린다. ‘아니라구, 아니라니까. 진짜 아닌데. 구시렁구시렁.’ 그런데 나도 모르게 손에는 스마트폰이 고스란히 들려 있다. 검색하는 웹페이지는 언제나 비슷비슷하다. 뻔한 뉴스 검색, 내 책을 포함해 다양한 책들과 음악 서칭, 공연이나 콘서트 확인까지 거치면 은근 시간이 쭉쭉 흘러가 있다. 그러다 보면 뭔가 죄책감이 들기 시작한다. 스마트폰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는 삶을 살라고 수많은 매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한 외침도 결국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는 나, 그리고 현대인들.


그런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요즘은 전자책을 정기 구독 중이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 같은 소비성 활동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나를 다독이려 애써본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나의 행동 정당 방어라고나 할까. ‘나는 오늘도 독서를 한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구시렁구시렁.’


오늘도 지하철에 올랐다. 플랫폼에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을 들을 때까지 계속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나였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지하철을 타서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보았는데 이게 웬걸. 스마트폰을 안 들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나마 죄책감이 드는 나 정도면 양심적인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모습은 뭔가 현대미술의 한 단면인 듯 묘한 기시감으로 다가온다. 얼른 나의 스마트폰을 가방 안에 휙 던져 넣어버렸다. 드디어 손에서 사라져 버린 스마트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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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함께 부유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요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꽉 막힌 창 너머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것을 그냥 무의식적으로 쳐다본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그동안 머릿속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쑤셔 넣어왔던 것일까. 잠깐의 휴식, 내 삶의 쉼표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몸도 나른해지고 머릿속은 순간 텅 비어버리는 여유로움이 몰려온다. 잘 비워야 잘 채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을 때 인류는 24시간 쉬지 않고 밝은 빛 아래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누렸지만 동시에 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일을 더 해야 했다. 더불어 글로벌화, 분업화, 효율성 따위를 일장 연설을 통해 사람들에게 세뇌시켜갔다. 결국 나를 포함해 인류는 기술의 발전에 기립박수를 치면서 동시에 일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생겨나면서 잠시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일의 노예가 아니라 이것은 바로 일의 폭격이다. 매 순간 직장상사에게 전화가 오고, 거래처에서 문자가 온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정신마저 혼미해진다. 팀별로 단체 깨톡방도 만들어져 있다. 오밤중에도 상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업무 진행상황을 체크한다.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4차 노예 혁명인 것만 같다. 회사 내 단체 깨톡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기사도 여럿 보았다. 그것 역시 제발 없앴으면 하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좋은 것도 스마트폰으로 나쁜 것도 스마트폰으로. 에라이. 그냥 바다를 향해 집어던지고 싶다. 하지만 금단 현상이 오겠지. ‘부들부들.’


학창 시절 창가에 앉아 있는 친구들은 꼭 멍 때리다가 선생님에게 쥐어 박히곤 했다. 수업이 얼마나 재미없었으면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물론 선생님은 하지 않으셨다. 그냥 멍 때리는 것은 미운 오리 새끼인 마냥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멍 때리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 많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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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리다가 엉겁결에 유레카


결국 2014년 10월 27일 서울시청 앞 잔디밭. ‘제1회 멍 때리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살다 살다 무슨 이런 대회가 열렸나 싶지만 너무나도 필요한 대회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인기가 전국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11월에는 중국 청두에서, 12월에는 상하이에서도 대회가 열렸다. 사실 사람들은 멍 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혀를 쯧쯧 찬다. “때가 어느 때인데 저러고 사는 건지 원.” “열심히 뼈 빠지게 살아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멍하니 살면 어쩌누.” 이러한 행동을 더없이 비생산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멍 때리는 행동이 세상을 바꿀 만큼 놀라운 창의적인 아이디어 생산으로 이어진 경우도 많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지….


벌거벗은 채로 외친 한마디, “유레카.”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헤론 왕의 왕관이 순금인지 조사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는 했지만 영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머리를 식히고자 목욕탕에 몸을 푸욱 담갔는데 그곳에서 발견한 부력의 원리, 그리고는 외친 한마디, “유레카.”


사과나무 밑에 멍하니 서 있다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낸 뉴턴 역시 멍 때리다가 인류 역사를 바꿔버린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비판 철학의 창시자인 칸트 역시 멍하니 산책을 하며 자신의 철학사상을 정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자비한 구조조정을 단행해 ‘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이 있지만 경영학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잭 웰치 전 GE 회장도 매일 한 시간씩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을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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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멍 때리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무작정 떠오른다고 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말 것. 그동안 쌓아온 지식들과 지혜들이 멍 때리는 동안 잘 섞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 준비된 자에게만 주는 위대한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멍 때리는 것이 어떻게 취미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판단했을 때 충분히 그것만으로도 취미가 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취미 역시 뭔가를 쉬지 않고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받아들여 왔던 것은 아닐까 싶다. 운동을 해야 하고, 그림을 그려야 하고, 영화 감상이나 독서를 해야 하고 등등등. 그런데 뭔가를 너무 많이 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즐거움은 더없이 큰 기쁨일 수 있다. 그 자체로 취미로 인정 가능하다는 것이다.


몸의 이완을 위해 모두가 추천하는 스트레칭. 그렇다면 정신 또는 뇌의 이완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를 추천할 수 있을까. 바로 ‘멍 때리기’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다고 해서 무시하지 말지어다. 과학적으로 보면 뭔가 호르몬 분비에도 좋고, 정신 건강에도 좋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블라블라 하는 연구결과도 많이 있다.


스마트폰의 노예들이여. 오늘부터 하루 10분 만이라도 스마트폰을 집어던지고 가만히 앉아 있어 보자. 일본에는 최근 스마트폰을 강제로 가두어두는 금고까지 생겼다고 한다. 오죽 절제할 수 없었으면 그러한 금고가 생겨났을까.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한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참으로 귀찮은 것이 많아지는 오늘날인데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것은 왜 그리 귀찮지도 않은지 모르겠다. ‘이상하다, 이상해.’


그래도 난 하루에 몇십 분씩은 스마트폰에서 강제 해방되는 방법을 찾아냈다. 물론 이것도 다 노력이 필요했고, 연습이 필요했으며, 의지마저 절실했다. 멍 때리다가 스르륵 잠이 든다. 꿀잠에 빠져든다. 곁에는 야옹이들이 “야옹, 야옹”거리며 놀아달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무엇을 했기에, 어떻게 했기에, 왜 했기에. 취미라 해도 민망하지 않은 나만의 멍 때리기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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