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엉망진창이지만, 내일은 나답게
‘지휘자는 없어도 되지만, 콘트라베이스만은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음악을 아시는 분이면 누구나 인정할 겁니다. 콘트라베이스가 다른 악기들보다 월등하게 중요한 악기라는 것을 서슴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입니다.’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콘트라베이스》 중 일부이다.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를 떠올릴 때마다 분명 이런 생각이 든다. 왜일까? 나는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를 약 3년째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실용음악학원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딱히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간 것도 아니었다. 에릭 클랩튼, 게리 무어, 브라이언 메이에 빠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좀비처럼 기타를 찾아야 할 건데 나는 기타 꿈을 꿔본 적도 없다. 진즉에 기타라는 악기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다. 어쩌면 기타가 나를 선택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악기처럼 예민한 물체는 생명이 없을지라도 연주를 할 사람을 고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애정이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쪽에서 먼저 지레짐작한 것일까. 어쨌거나 서로에게 피곤함을 주진 않을 테니 잘한 결정인 듯싶다.
그런데 솔직히 그냥 마땅히 떠오르는 악기도 없었을 뿐더러 피아노는 아주 높은 실력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시간도 많이 들고, 심지어 악기를 들고 다닐 수도 없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학원에 나와 연습하는 것이 귀찮을 것만 같았다. 원장 선생님의 기타 레슨 설명을 듣다 말고 학원을 한 바퀴 휙 둘러보기로 했다. 분명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등록하진 않겠군.’
그런데 어느 레슨실 방구석에 엄청나게 큰 현악기가 하나 기대어 서 있었다. 상당히 불량스러워 보였다. ‘저렇게 벽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라니.’ “저, 저 악기는 뭔가요. 왜 저렇게 크죠?” 그렇게나 종종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도 그 악기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니. 덩치만 저렇게 크지 참으로 존재감 없는 악기였나 보다. “아, 콘트라베이스예요. 수강생이 아직 없기는 한데 수업은 가능하세요.” “저 악기 배우는 데 많이 어려울까요?” “뭐, 열심히 하기에 달린 거잖아요.” “그럼 저 악기 배울게요.” “네?”
분명 이런 대화가 오갔던 것 같다. 2미터에 육박하니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 악기이다. 어떤 소리가 나는지 기억도 없었다. 단지 첼로보다 더 깊고 중후한 소리를 낸다는 어렴풋한 짐작 정도였다. 그냥 감이 왔다. 저 악기를 꼭 배워야 할 것만 같은 운명적인 운명에 느낌적인 느낌이 전율처럼 찌릿했다.
베이스를 배울 거라면 왜 굳이 일렉 베이스를 배우지 않았을까 하고 누군가는 물어보곤 했다. “남자라면 자고로 일렉 베이스지. 콘트라베이스는 뭐냐?” “그런데 어쩌겠니, 내가 배우고 싶다는데. 레슨비 보태주지도 않을 거라면 그냥 아닥하세요.”
첫 날 수업이 기억난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첫 번째 콘트라베이스 학생이라고 하셨다. 현장에서 연주로 이름을 날리던 분이신데 내가 이곳에서 첫 제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 이야기가 딱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극히 탐미주의적인 심정으로 악기를 내 두 손으로 잡아보고 싶었다.
《콘트라베이스》에는 살이 피둥피둥한 아줌마 같은 악기라고 묘사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첫 눈에 반하게 한 지상 최고의 미녀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악기의 돌연변이라고 지칭한 쥐스킨트의 발언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 개의 줄마저 빨리 뜯어서 연주해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3년이 흘렀다. 세계 최고의 미녀를 만난 설렘으로 넘실거리던 학생의 마음은 어느덧 일상의 공기를 뻔하디 뻔하게 마시는 심정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드디어 이 악기를 갖고서 공연을 하러 다니며 밴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기도 하다. 내 악기가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소리를 아래에서부터 받쳐주는 역할을 하기에 언뜻 무슨 악기인지 관심조차 없을 수도 있다. 화려하지 않고 묵묵하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의 군중 속에서 외롭기 그지없게 존재하는 소시민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3인조 어쿠스틱 재즈밴드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서 이 악기의 존재감은 가히 페르시안 왕자님 대접이다. 멜로디 악기인 피아노와 기타가 이 악기의 등장에 목말라한다. 메트로놈처럼 사운드를 받쳐줘야 편하게 리듬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밴드에는 드럼이 없기 때문에 더욱 콘트라베이스의 가치는 빛난다. 《콘트라베이스》에서 콘트라베이스는 존재감 없는 영혼처럼 그려져 있지만 나의 현실에서는 분명 다르다. 낮은 담장 넘어 집안에 숨어 있는 최 진사 댁 셋째 딸 같은 위치라고나 할까.
스스로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전체의 하모니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다. 아니면 상대를 빛내기 위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조연과 같은 사람도 있다. 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언제나 그러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악기를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를 마음속에서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악기는 첼로랍니다. 많은 분들이 헷갈리시더라구요. 아니면 잘 몰라서 첼로라 생각하시는 것일 수도. 심지어 픽사베이에서 콘트라베이스를 검색했는데 이 사진이 나오더라구요. ㅠㅠ)
하지만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 자체로만 본다면 주변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촛불처럼 고결하고 가치 있다고 할 만하다. 인생은 타인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나는 언제나 조연이지만 내 인생은 언제나 나에게 주연의 삶이기 때문이다.
콘트라베이스는 내 목소리처럼 깊은 심연의 소리를 낸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곁에 두고서 늘 수다 떨고 싶은 친구 같다. 찰떡궁합처럼 잘 맞는 그런 친구 말이다. 하지만 부피가 크고,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는 못한다. 딱 그만큼의 관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없이 나와 잘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는 유지하게 되는 사이.
콘트라베이스는 철학적 명제를 던져주듯 매일매일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이 악기가 좋다. 남들은 잘 몰라도, 나는 잘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로 이 악기를 메고서 다음 주에도 공연을 떠난다. 찰리 헤이든이나 에스페란자 스팔딩 같은 명연주자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지금도 내 연주의 주인공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