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복사 좀 해 와요”의 나비효과

인정받는 미생의 디테일한 습관

by Jeremy

나 대리님이 우리 팀에 들어오고서 하루가 다르게 바삐 돌아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과장님과 나 대리님을 제외하고 우리끼리, 즉 최 대리님, 선배, 나 이렇게 셋만 주고받는 카톡 단체방이 있는데 거기서 대리님은 언제나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표현만 주구장창 쓰고 있었다. 너무 자주 듣다보니 이제는 지겨워서 그 방에서 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아, 힘들어도 너무 힘들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한 건 아닌가 싶어. 본인이 우리 팀장이야 뭐야. 아무리 TF팀으로 구성되어 바쁘게 돌아간다고 해도 일이 너무 많아서리 이거야 원.’

‘그러게요. 대리님. 힘내세요. 그래도 업무를 차근차근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인 거 같기는 하더라고요.’




늘 이런 분위기였다. 최 대리님은 불평불만, 선배는 뭔가 기대하는 눈치. 그리고 그 기대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야 아직까지 신입 취급이라 업무 지시가 떨어지면 그에 맞는 일을 차근차근 해나갈 뿐이지만, 그래도 나 대리님은 언제나 업무 상황을 체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없는지를 본인만 알고 일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꼭 나에게 물어보았다. 알 듯 말 듯 하지만 이 팀에서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자존감과 함께 소속감마저 예전보다 더 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뭔가 효율적으로 일 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이 더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퇴근 시간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저기, 이거 좀 복사 좀 해줘.”

“네, 알겠습니다. 몇 부나 필요하세요?”

“5부만 해주면 좋겠는데.”


“네”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드는 멘트가 있었다. 당연히 내가 신입이자 막내이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한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나 역시 그냥 으레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대답을 했다. 그런데 뭔가 그 당연하다는 분위기를 깨뜨리는 색다른 외침이 들려왔다.




“대리님. 이건 아니죠. 본인이 해야 할 일 아닌가. 신입 사원이라고 해서 복사를 시키면 문제가 좀 있지 않나요? 요즘 사내에서 인권 및 페미니즘 교육이 강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좀 곤란해요.”

“늘 하던 거잖아요. 제가 나 대리님에게 시킨 것도 아니고. 문제없잖아요.”

“아니죠.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는 거 아닌가요? 본인도 윗분들이 복사 해 와라, 짐 좀 날라라, 커피 타와라, 이런 거 시키면 싫지 않았을까요?”

“그, 그건, 그렇지만. … 알았어요.”

“네 빠르게 잘못을 인정하시고 행동하시는 모습이 좋습니다. 업무가 많으니 다들 자신의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굳이 부하직원이라고 해서 궂은 일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역시나 과장님은 묵묵부답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러고 보니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싶었다. 더 이상 잡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물론 나 역시 업무에 집중하다 보면 이런 거 시킬 때 좀 귀찮기는 하다. 집중하다가 집중이 깨지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상대로 단톡방에 글이 올라왔다.


‘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부탁 좀 할 수 있지. 나한테 부탁하기만 해봐라, 내가 아는 척이라도 하나 봐라.’

‘….’




선배와 나는 그 문장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아니 읽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우선 일이 많아서 굳이 읽을 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어떤 내용이 올라왔을지 뻔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복사 요청이겠지만, 그 요청을 받는 사람은 업무 리듬이 깨지기 쉬울 것이다. 정말 개구리에게 작은 돌맹이를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개구리 입장에서는 집채만한 바위가 날아오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대리님이 우리 팀에 오고 나서 업무 처리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직장인으로서의 마인드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좋은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어서 신입 사원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즐겁기만 하다. 최 대리님께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 정말 직장인으로서 업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에 나 대리님의 입성에 대해 내 마음속으로는 물개 박수를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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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모래 위에 기록하고 다른 사람에게 받은 은혜는 대리석 위에 새겨라. - 벤저민 프랭클린


1706년 미국에서 태어난 벤저민 프랭클린은 13남매 중 10번째였고,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형제, 자매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가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음을 일찌감치 깨달은 그는 먹고 살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정규 교육은 8세부터 2년간 학교에 다닌 것이 전부였으며 이후는 독학을 통해 지식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프랭클린을 지적하는 이들은 종종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까닭에 깊이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그는 기성 학문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고 늘 자유롭고도 독창적인 발상과 시각을 유지해왔기에 오늘날 어떠한 이론보다 실용성에 있어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직접 인쇄소를 차렸으며 지역 사회를 위한 도서관과 소방대 및 대학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1748년 40대 초반의 나이로 사업에서 은퇴한 이후 과학 연구에 열중하여 난로를 발명하기도 했고, 전기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도 했다. 그는 평생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없는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실용적인 사고방식 아래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하늘에서 번개를 훔쳤고, 군주에게서 권위를 빼앗았다’라는 업적을 통해 세계 최초, 미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갖고 살아온 팔방미인이자 최고의 르네상스맨이었다. 더불어 그가 이야기하는 13가지 삶의 덕목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데, 그 덕목들은 바로 ‘절제, 침묵, 질서, 결단, 검약, 근면, 성실, 정의, 온건,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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