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소설 2부- 조선의 아이돌 11

제11화 – 왕의 이름을 삼킨 자들

by 초롱초롱 박철홍

제11화 – 왕의 이름을 삼킨 자들


의경세자는 너무도 곧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세자는 폐위되어 깊은 산중 외딴곳에 유폐된 노산군(단종)보다 세 살 더 많은 ‘형’이었다.


세자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세종할아버지께서 자신을 첫 손주라 부르며 품에 안고, 볼에 입 맞추시던 그 따스한 날들을. 궁궐 구석구석을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녔던 어린 시절 빛나던 기억들.


문종대왕, 그 인자하던 큰아버지 모습도 아련했다. 한없이 다정한 그 눈빛은 친부보다도 더 깊은 애정을 담고 있었다.


유년시절, 노산군이 형이라 부르며 궁궐 곳곳을 함께 뛰놀던 기억은 세자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아련한 빛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 깊은 산중, 외딴곳에 갇힌 노산군 처지가 떠오를 때마다 세자 가슴은 칼날에 베인 듯 저릿하게 아파왔다.


세자는 병약한 몸을 이끌며 굳게 다짐했다.


"다시는 이 궁궐 안에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은 한없이 쇠약해져, 눕는 것조차 버거웠다.

숨결은 점점 가늘고 짧아져 갔다.

가슴 한복판에 쌓인 답답함은 깊어져만 갔다.


주상께서도 애를 썼다.

스물한 명 승려를 경회루에 모아 공작재(孔雀齋)를 열고 온종일 불경을 외우게 했으나 세자 병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경세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제 막 스무 해가 지나고 있는데 인생이라 부르기에도 아까운 짧은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그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이제 겨우 세 살 된 월산과, 두 달 도 채 안 된 자을산이었다.

그 어린 두 아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현실이 세자 가슴을 무너뜨렸다.


그들의 어미, 소혜왕후는 누구보다 야심이 크고 강단 있는 여인이었다. 자기가 죽고 난 후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세자는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릴 듯 두려웠다.


"내가 이대로 세상을 떠난다면, 세자 자리는 결코 월산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세자는 모든 게 눈에 보였다.


아직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월산보다 열 살이 다 된 늠름한 해양대군이 있었다.


주상도 물론 주상이지만, 정희왕후(세자의 어머니)는 분명히 본인이 배 아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자로 만들려 할 터였다.


욕심을 버려야 했다.

아들을 살려야 했다.


그리하여 세자는 결심했다.


1년 전, 형제의 맹세를 나눈 귀성군 이준과 남이, 그리고 세자빈과 해양대군을 병상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종이와 붓을 청해 힘겹게 한 수의 시를 써 내려갔다.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이 주란(朱欄)에 가득 찼네

명황이 촉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빈장만 남았으되 반겨보지 않았네]


그 시를 본 이들의 얼굴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 시 안에는 불길한 예감이 서려 있었다.


귀성군과 남이는 세자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세자 모습은 마치 저물어 가는 햇살처럼 안타까웠다. 남이 무과 장원급제 축하잔치 날 그 밤의 맹세가 아련히 떠 올랐다.


세자의 얼굴은 점 점 사그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정하고 기품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평상시 세자의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되 위압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는 고운 시구처럼 조심스레 다듬어져 허투루 흘러가지 않았다.


걸음걸이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 했고, 손끝까지 예법을 잃지 않았다.


세자의 이런 모습은 꾸밈이 아닌 천성에서 우러난 성정이었다.


누군가는 감탄했다.


“사람이 이토록 반듯할 수 있구나.”


또 누군가는 숙연히 말했다.


“그 얼굴만 보아도 마음이 숙연해진다.”


세자는 마지막 숨결처럼 희미해져 가는 시선을 해양대군에게 고정했다.


세자의 간절한 당부가 담긴 애절한 눈빛과, 해양의 깊은 슬픔이 어른거리는 눈동자가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이 닿는 순간, 말없이도 모든 사연이 전해졌고 그 잔잔한 파동은 둘 사이에 조용히 일렁였다.


소혜왕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자는 귀성군과 남이를 가까이 불렀다.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그날… 형제의 맹세를 했을 때, 혹 내가 쓰러지면 해양대군을 부탁한다고 말했지.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네.

자네들과 함께 조선을 바꾸고 싶었네.

그러나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네.

내가 떠난 뒤라도 해양을 도와 반드시 이 나라를 변화시켜 주게.”


바로 그때, 세조와 정희왕후가 조용히 세자 방으로 들어섰다.


세자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정희왕후가 다가와 조용히 말렸다. 두 사람은 세자의 손을 꽉 잡았다.


세자의 입술이 간신히 움직이며, 한 마디를 남겼다.


“해양을… 세자로 삼으소서…”


그 말은 피처럼 뼛속 깊은 한 맺힘에서 흘러나온 절규였다.


정희왕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세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를 본 일행들은 황망했다.


귀성군 표정은 돌처럼 굳었고, 남이의 눈썹은 미세하게 떨렸다. 소혜왕후는 두 손을 꼭 쥔 채 세자 마지막 말을 가슴속에서 밀어냈다.


조선 백성들의 사랑과 인기를 한 몸에 받던 그 귀공자 중 한 명이였던 세자가 끝내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 갔다.


의경세자의 장례가 끝난 후,

왕궁 후원 한편. 귀성군, 남이, 소혜왕후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해양이라니… 정통을 외면하는 것이옵니다.”


남이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아이 성정은 칼과 같습니다. 칼은 쓰는 자에 따라 나라를 살리기도 망치기도 하지요.”


소혜왕후는 힘없이 부채를 접으며 낮게 말했다.


귀성군은 아무 말 없이 연못에 돌을 던졌다. 잔잔한 수면 위로 파문이 퍼지고 물비늘이 조용히 일렁였다.


“저하의 피를 이은 아들이 버젓이 있는데… 조모와 조부의 뜻만으로 세자를 바꾼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피를 흘린 것입니까…”


소혜왕후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해양대군 세자 책봉 문제로 격론이 일었다.


찬성파는 말했다.


“왕실의 안정을 위하여 강단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해양대군은 주상의 친자이며, 왕재 기운이 느껴지는 자입니다.”


반대파는 격렬히 반박했다.


"의경세자 장자가 살아 있는데 후계를 바꾼다면 조정명분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는 왕실 근본을 흔드는 일입니다.”


조정대신들은 서로 경계하며 비밀리에 움직였고, 민심도 둘로 갈라졌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단호했다.

세조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무엇보다 무거운 ‘동의’였다.


세자 책봉이 결정된 밤,


해양대군은 침전 밖 정자에 홀로 앉아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옷깃에는 어린 시절 백일장 나가 붓을 들던 묵향이 남아 있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나를… 모두가 칼이라 부른다.”


그는 중얼거리며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좋다. 나는 칼이 되겠다.

하나, 자르는 것은 오직 썩은 뿌리뿐이다.”


해양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귀성군 그림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왕위계승 서열 다섯 번째 안에 드는 귀성군은 늘 해양에게 불안한 존재였다. 주상께서 귀성군을 지나치게 총애하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주상의 귀성군에 대한 그 애정이 언제, 어떻게 칼날이 되어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해양대군은 세자가 되었고, 월산은 왕의 길에서 멀어졌다.


귀성군과 남이는 점차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특히 남이는 특유의 오만함으로 조정의 칼끝 위를 걷게 되었다.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 훈구 대신들이 권력을 틀어쥐었다.


소혜왕후는 억울함과 비통함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정숙하게 지내며 어린 월산에게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해양이 왕이 되어도 너는 너의 품을 잃지 말아라. 우리가 잊혀도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왕이 되는 길은 명분으로 닦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은 피로 씻어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


조정은 멈추지 않았다.


충의와 야망, 피와 칼날이 어우러진 궁정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그러나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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