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소설- 조선의 아이돌 12

제12화 – 붉은 품계와 검은 그림자

by 초롱초롱 박철홍

제12화 – 붉은 품계와 검은 그림자


조정에 새로운 세자가 오르자 궁 안팎의 공기가 달라졌다.


해양대군, 아니 이제는 세자 이혈이라 불리게 된 아이는 고작 열 살이었다. 그 이름 앞에 조정은 조심스레 무게를 얹었다. 그것은 존칭이 아닌 시험 이자 감시의 무게였다.


소년 세자는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채워짐 이전 긴장에 가까웠다. 그 침묵 속엔 숨겨진 야심과 결기가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아무도 그 내면 흐름을 읽어내지 못했다.


소년 세자를 아는 자들은 두려움과 기대를 함께 품었고, 세자를 모르는 자들은 단지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를 노리는 또 하나 꼭두각시라 여겼다.


궁궐 깊은 곳, 정희왕후는 세자를 앉히고 말했다.


“이 혈, 너는 조선의 검이 되어야 한다. 조선은 약한 왕을 버린다. 약함은 곧 죄다. 너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


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그 눈은 정희왕후를 조용히 마주했고, 그 속엔 철처럼 굳은 의지와 고요한 야망이 떠올랐다.


한편 궁 밖,귀성군은 밤중에도 촛불 아래 문서를 펼치고 있었다.


남이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불빛이 바닥을 따라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해양대군… 아니, 이제는 세자가 되었지요. 저희는 이대로 밀려나야 합니까?”


귀성군은 대답 대신 벽에 걸린 칼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벼르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지.”


남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기다려서… 무엇을 말입니까?”


“때를. 권력은 손아귀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네. 빈틈을 타고 흘러드는 것이네.”


남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씁쓸함과 불편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하나 저하의 장자, 월산대군은 어찌하란 말입니까? 의경세자의 피를 이은 정통은… 그 아이입니다.”


귀성군은 눈을 감고 한참 말이 없었다. 긴 침묵 끝에 낮게 중얼이듯 말했다.


“정통은 칼이 아니네.

명분은 사람을 끌어당기지만, 권력은 사람을 밀쳐낸다네.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지금은 줄을 타는 중이지.”


남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나 남이 마음속 안에서 신념인지 충성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조용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세자궁 안. 깊은 밤.


이혈은 책을 덮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한명회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존재는 마치 그림자처럼 무색하고 무거웠다.


“저하, 신에게 명을 내리소서.

어느 쪽이든… 조정을 저하 세력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손을 들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조용히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귀성군을… 멀리 두세요. 그러나 너무 멀게는 하지 마십시오.”


한명회의 눈빛이 번뜩였다. 세자의 말은 이어졌다.


“남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자를 베는 건 쉬우나 그늘에 두는 것이 오래갑니다.”


열 살짜리 소년의 말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어휘였다.


한명회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이 아이는 칼이 아니다.

칼을 품은 사람이다.”


한명회는 세자의 마음을 읽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의 권력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라 확신했다.


소혜왕후는 정원에서 어린 아들, 월산대군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월산은 이제 겨우 네 살. 또래보다 훨씬 영리했고 감각이 예민했다.


그 아이는 문득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머니, 나는… 왕이 안 되는 거예요?”


소혜왕후는 순간 숨을 멈췄다.

곧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너는 누구보다도… 왕의 품을 가진 아이란다. 그러나 세상은 품만으로 움직이지 않지.”


“그럼, 어떻게 움직여요?”


소혜왕후는 대답 대신 곁에 핀 매화 한 송이를 꺾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때를 기다려라.

꽃도 봄이 와야 핀단다.

그 봄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월산의 눈동자는 맑았다.

하나 그 안엔 어린아이답지 않게 깊고 외로운 빛이 머물렀다.


세자가 된 해양은 자주 홀로 남았다.


그가 마주한 세상은 너무도 크고 말 없는 적들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외롭다 느끼지 않았다.


밤마다 붓을 들어 글을 지었다.


“이름을 삼킨 자들이여,

이름 아래 눌리지 말라.

너의 칼은 너의 것이고,

그 피는 너의 나라가 흘릴 것이다.”


그 시를 본 신숙주는 아무 말 없이 서책을 덮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세자가 아니다… 군왕이로다.”


그해 겨울.


눈은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나 조정은 유례없이 분주했다.


붉은 비단 인장이 찍힌 붉은 품계 인사령이 잇따라 내려졌고 낮에는 벼슬을 받은 이들이 웃었지만 밤이 되면 공기가 달라졌다.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자들이 말없이 골목을 가로질렀고 횃불도 들지 않은 말들이 성문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누군가는 승진했고 누군가는 사라졌다.


모두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조정이 조용할수록 그 속은 더욱 소란스러웠다.


권세는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았고 충의는 말없이 눈을 감았으며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왕의 이름을 삼킨 자들.


그들은 이름을 잃는 대신 조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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