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소설- 조선의 아이돌 13

제13화 – 핏빛 도성의 맹세

by 초롱초롱 박철홍

제13화 – 핏빛 도성의 맹세


세자가 된 해양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그 중심은 결코 단단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품계를 받는 자들이 생겨났고, 또 그만큼 사라지는 자들도 있었다.

환한 날에도 조정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고, 궁궐은 바람 없는 날에도 옷깃을 여미게 했다.


그리고 어느 밤 조정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날 우의정 심회가 독살되었다.


비단 안개처럼 퍼진 독이 찻잔 속에 녹아들었고, 그는 단 세 모금 만에 입술을 물들이며 쓰러졌다. 잔에서 흘러내린 핏빛이 차가운 바닥을 타고 번졌다.


우의정 심회는 훈구대신들 가운데서도 드물게 의경세자를 따랐으며, 귀성군과도 뜻이 잘 통하는 사이였다. 비록 나이 들어 노쇠했으나 그는 여전히 조선의 새로운 변화를 갈망했고 귀성군과 남이처럼 개혁의 길을 걸으려 했다.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과는 자연스레 각을 세우며 조용하지만 단단한 의지로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심회 독살은 도성을 공포로 얼어붙었고 대신들의 얼굴에는 감히 말 못 할 불안이 드리웠다.


“누가… 감히 이런 짓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이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명회.


그러나 정작 한명회는 아무 말 없이 도성을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한명회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칼을 들지 않아도 사람들은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귀성군은 분노로 술잔을 내던졌다.


“심회가 죽었어. 이제 남은 건 누구지? 다음은 나고… 그다음은 남이 자네야.”


남이는 조용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빛만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럼, 먼저 칼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성군은 고개를 저었다. 웃음도 분노도 없는 표정으로.


“아니. 먼저 무릎 꿇는 쪽이 이기는 거야. 지금은 이기려 하면 진다.”


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조용히 자신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다. 남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성정이라는 것을.


그 밤, 소혜왕후는 홀로 궁 안의 작은 사당을 찾았다. 의경세자의 영정이 고요히 모셔져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절하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당신의 형제들이… 당신의 의기를 따라가려 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길은 모두 다릅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 형제들이 서로 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지금의 조정은 둘 중 하나를 칼로 선택해야만 하는 자리로 몰아가고 있어요.”


그녀 목소리는 기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속삭임이 되었다.


“저 또한… 선택을 해야 해요. 아직 미숙한 그 형제들보단 계유정변을 함께한 훈구 대신들이 더 믿음직합니다. 그들이라면… 당신의 아들을 당신이 못 하고 간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을 거예요. 설령, 그 길에 당신의 형제들이 다칠지라도… 날 원망하진 마세요.”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소혜왕후도 한 사람의 아내이기 전에 엄마가 더 먼저였다.


새벽, 세자 이혈은 혼자 편전을 나섰다. 달은 희미했고, 궁 안은 아직 고요했다.


그를 맞은 이는 잠들지 못한 정희왕후였다.


“이른 시각이구나. 어딜 가느냐?”


“맹세하러 갑니다.”


“무슨 맹세를?”


세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 눈동자에 망설임도 결의도 함께 담겨 있었다.


“조선을 지키겠다는 맹세입니다. 그리고… 피를 덜 흘리고 끝내겠다는 맹세.”


정희왕후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소년은 이미 자신이 만든 ‘칼’을 거꾸로 쥐고 있다는 것을. 칼날을 손바닥으로 쥐는 자는 언젠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다음 날, 그녀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조용히 불렀다.


“세자는 내가 키운 칼이오.

하지만 이제는 그 칼이 누구도 베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조차 모른다오.”


그 말을 들은 한명회는 세자 편전에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늦가을, 도성 남쪽에서 무명의 스님 하나가 스스로 목을 맸다.

그가 남긴 유서엔 단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정통은 누구인가."


그 글귀는 조정 전체에 비문처럼 퍼졌고, 민심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통은 누구인가—월산인가, 세자인가?”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속으로 대답을 달리했다.


그해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 세자와 귀성군은 조용히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아무도 없는 편전 안, 바람은 창호지를 스치고 있었다.


세자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의경 형님이 돌아가시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날 귀성형님께서는 제 손을 잡고 말씀하셨지요.

‘너는 아직 어리지만, 반드시 날 뛰어넘을 것이다.’ 하지만

‘너도 그때가 되면 조선이 가야 할 길을 보고 가야 한다’고.”


귀성군은 말없이 세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엔 더 이상 소년의 불안도, 청년의 야망도 없었다. 그저, 왕실의 무게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는… 형님을 무작정 뛰어넘지 않겠습니다.”


세자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단호했다.


“나는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날의 형님과 맹세를… 저는 잊지 않겠습니다.”


귀성군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묻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널… 내가 지켜줄 수 있을까."


그날 밤, 남이는 방 안의 검을 꺼냈다.


어릴 적부터 아끼던 검이었다. 아직 단 한 번도 사람을 벤 적은 없었지만, 그날 밤 그는 직감했다.

이제는 그럴 때가 왔다.


검을 허리에 찬 그는, 마당으로 나가 검을 한 번 휘둘렀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눈송이 하나가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남이는 고요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피는… 흘릴 것이다.

피를 원치 않는 자들 때문에, 더 많이.”


그날 밤, 도성의 하늘엔 두 개의 별이 동시에 스러졌다.


하나는 너무 일찍 떠오른 별이었고,

하나는 너무 늦게 사라진 별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한 조각 맹세만이 남았다.


핏빛으로 새겨진, 조선이라는 나라의 왕좌를 향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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