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푸른 물결, 검은 물결
제14화 푸른 물결, 검은 물결
남이는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움직였다. 궁궐 곳곳에 번지는 권력의 냄새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한 그는 가장 먼저 유자광을 찾아 나섰다. 실력과 야망을 갖춘 유자광이야말로 함께 움직여야 할 때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네.”
남이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지만, 속마음엔 불안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저 늙은 여우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네.”
유자광은 고개를 저으며 한참을 망설였다. 눈빛은 어두웠고, 계산과 주저함이 뒤엉켜 있었다.
“그들은 아직 막강한 힘을 지녔습니다. 무턱대고 칼을 휘두르면 도리어 우리 목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유자광은 망설임 끝에 어렵게 답했다.
남이는 자광의 말을 이해했지만 마음 한편은 답답함으로 가득 찼다. 믿고 의지했던 유자광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믿기지 않아 실망이 밀려왔다. 진정한 변화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 무렵, 세조는 깊은 밤 조용히 귀성군과 남이를 궁궐 깊숙한 곳으로 불러들였다. 아무도 모르게 은은한 등불 아래에서 세조의 눈빛은 차갑게 번뜩였다.
“한명회, 신숙주… 그들의 공은 크나, 권세가 너무 무겁다. 조정이 너무 오래되어 숨이 막힌다.”
그러나 세조 말속에는 피비린내 대신 결연함이 묻어났다.
“나는 더 이상 피를 원치 않는다. 젊은 인재를 불러 새 기틀을 세울 것이다. 특별 과거를 시행하겠다. 실력 있는 젊은 선비와 무사들을 뽑아 조정을 다시 세울 것이다.”
세조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희 둘도 준비하라.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만한 그릇이 되거라.”
남이의 가슴은 주상에게 자기 속 맘을 들킨 것처럼 쿵 무겁게 울렸다. 주상의 말은 칼보다 더 날카로운 엄명이었다.
며칠 뒤, 조정엔 ‘특별과거’라는 전례 없는 시험 소식이 퍼졌다. 나이 제한도, 신분 제한도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만 뽑는 시험. 세조의 의지는 분명했다.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귀성군 역시 은밀히 움직였다.
그의 학문은 정제되어 있었고 정치는 조용히 준비된 듯했다. 하지만 이번 시험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었다. 기성권력과 신진세력 간에 벌이는 전쟁이었다. 귀성군 주위 젊은인재들 이 시험을 볼 수 있도록 격려하고 다녔다.
어느 날 밤, 남이와 귀성군은 조용한 정자에서 마주 앉았다.
“남이, 자네는 칼을 믿는가?”
귀성군이 물었다.
남이는 허리에 찬 검을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칼도 믿지만 뜻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뜻이 없다면 칼은 그저 무색한 쇳조각일 뿐입니다.”
귀성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 뜻, 이번에 제대로 보여주게.”
특별 과거 당일, 궁궐 한복판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 있었다. 낡은 붓 대신 날카로운 필치와 깊은 사유가 시험대에 올랐다. 문제는 조정의 현실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기성 권력을 어떻게 견제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인가.>
이는 사실상 원로 훈구 대신들을 향한 도전장이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이 소식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주상이 변해가고 있다. 우리와 함께 목숨 걸고 정변을 일으켰지만 이제 그 칼이 우리를 겨누고 있다.”
신숙주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토사구팽이라. 그래도 오래 버텼네. 늙은 호랑이는 물러날 때를 안다네. 지금은 젊은 피가 나라를 이끌 때이지.”
그러나 한명회는 신숙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범홍, 그대 말이 한가해 보이네. 이 싸움은 물러서서 끝날 일이 아니네. 우리 목숨이 달렸네.”
시험 결과가 발표되자 조정은 술렁였다. 남이와 귀성군, 그리고 다수의 신예들이 합격자 명단에 올랐다. 이들은 세조의 새로운 뜻을 품고 있었다.
세조는 새로 합격한 인재들을 한자리에 불러 담담히 말했다.
“너희는 단순히 과거를 통과한 자가 아니라, 내 뜻을 이어갈 자들이다. 칼이 아닌 뜻으로, 권세가 아닌 도리로 나라를 이끌라.”
남이는 허리에 찬 검보다 품속에 든 붓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조정은 결코 순순하지 않았다.
한명회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위 대신들에게 들으라 말했다.
“젊은 기세는 좋지만 정치는 바람과 같네. 뜻만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네.”
신숙주도 맛장구치며 덧붙였다.
“주상께서 특별 과거를 시행한 뜻은 알지만, 조정의 질서는 쉽게 바뀌지 않네. 젊은 인재를 위한 자리는 우리도 한때 차지했었네.”
그들의 말에는 겉으로는 예의 바른 충고 같았지만 속엔 경계와 위협이 스며 있었다.
그때, 유자광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러나 은밀히 남이를 찾아왔다.
“그때 내가 물러선 것은 겁 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시기를 봤던 것이지요. 이제 때가 온 듯하옵니다.”
남이는 자광의 눈빛에서 달라진 무언가를 보았다. 주저함 대신 야망 망설임 대신 갈증이 서려 있었다.
“이번엔 나와 함께 하겠는가.”
그러나 자광의 진심은 이번에도 확신하지 못했다.
조정은 점점 팽팽한 긴장으로 휘감기고 있었다. 젊은 신진세력은 왕의 뜻을 받들어 움직였고 기성 권력층은 노련한 정치력으로 맞섰다.
어느 날 조정에서 작은 사건이 터졌다. 신진관료 한 명이 부당하게 파직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실수라 했지만 그 이면엔 한명회의 압박이 숨어 있었다.
그날 밤, 남이와 귀성군은 다시 마주 앉았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 남이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아직 멀군요.”
귀성군은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멀지만, 분명히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네.”
남이는 허리에 찬 검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뜻이 검보다 앞서야 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뜻을 짓밟는다면…
"그땐 검도 피하지 않으리라."
귀성군 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남이가 고발한 고위 대신은 결국 파직되었다. 국고 횡령이라 했지만 누구나 신진 세력과 기성권력 간의 선전포고임을 알았다.
한명회는 말없이 남이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은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신숙주는 조용히 귀성군에게 말했다.
“과거를 통해 입궐한 제군들은 데리고 오는 건 환영하지만 그 자리엔 칼을 들고 오지 말게.”
귀성군은 미소 없이 대답했다.
“우리는 뜻을 들고 올라왔습니다. 뜻에 칼이 들러붙는다면, 그것은 시대가 만든 불가피한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