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흐른다 882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882
ㅡ 공민왕과 박정희 시해사건 ㅡ
1979.10.26
어느새 그날로부터 흐른 세월이 50년이 가까워 지고 있다. 세월의 무자비한 흐름이 참으로 두렵고도 놀랍다.
나는 1979년 당시 막 스무 살이 된 대학 1학년이었다. 그런 나에게 10·26은 아직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10.26 그날 당일 아침, 난 엄청난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었다.
초·중·고 시절 내내 유신교육을 철저히 받아온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평생 권좌에 있을 것이라 믿었다. 또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단군 이래 최대의 영웅”이라 칭하던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아침 뉴스에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는 소식은 고등학교 때와 다를 바 없던
살인적인 대학수업으로부터
이제는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는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10.26일 그 날 밤은
한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10·26이라는 그 역사적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우리 역사 속에는 10·26과 닮은 사건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고려말 <공민왕 시해사건>이다.
오늘은 이 두 사건을 나란히 놓고,
그 닮은 점과 궁금증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공민왕과 박정희!
두 사람은 시대도, 정치 체제도 다르지만 묘한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은 모두 권력정점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피살되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곧바로 새로운 권력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진실은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는 늘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자제위는 왜 공민왕에게 칼을 들었는가?”
“누가 자제위 그들에게 칼을 쥐여주었는가?”
“김재규는 왜 박정희에게 방아쇠를 당겼는가?”
“김재규는 정말 혼자 생각으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두 사건의 배경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다.
개인의 감정보다 더 깊은 권력 내부의 균열, 그리고 외부세력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점이다.
1979년 당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지만, 차지철을 비롯한 박정희 대통령 최측근 강경파에 의해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에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한미관계에도 미묘한 냉기가 돌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 ‘미국 개입설’이다. 일각에서는 CIA가 김재규 라인과 접촉했다는 주장 까지 나왔다. 또한 박정희 시해 직후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권력을 장악한 점은, 김재규가 누군가에 의해 고립된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을 키운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이 박정희 정권의 종말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더라도, 어딘가에서 간접적인 신호를 보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김재규에게 ‘이제 때가 되었다’는 식의 암묵적 가이드라인, 혹은 정당화 명분을 계속적으로 가스라이팅 했을 가능성을 크게 본다.
그날 김재규의 행적은 너무나 엉성했다. 치밀한 계획아래 일을 벌렸다기보다는 즉흥적인 충동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어이없을 만큼 허술한 행동 뒤에는 미국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재판정에서 김재규는 “민주화를 위한 혁명적 결단이었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은 오늘날까지도 의문을 남긴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민주화의 결단이었을까, 아니면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작동한 또 다른 힘의 그림자였을까.
10·26은 분명 한국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총성이 단지 개인의 결단만으로 울린 것인지 혹은 보이지 않는 외세의 손길이 그 방아쇠를 당기도록 유도했는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풀리지 않은 역사적 물음으로 남아 있다.
600년 전, 고려에서도 유사한 비극이 있었다.
1374년 10월 개혁군주 공민왕이 최측근 '자제위' 홍륜 등과 내시 최만생에 의해 시해됐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후궁 익비가 홍륜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에 격노해 홍륜을 죽이려 하자, 홍륜이 반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익비와 홍륜의 관계는 공민왕 스스로가 만든 정치적 연출 이었다. 그런데 왕이 스스로 만든 연출에 본인이 격노해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게다가 이 사건에는 여러 수상한 정황이 겹친다.
왜 공민왕은 가장 신임하던 홍륜, 최만생에게 살해당했는가?
왜 호위병들은 현장에 없었는가?
왜 공민왕 모후 명덕태후는 그 새벽에 공민왕 침전에 있었는가?
왜 그녀는 아들의 시신 앞에서 당황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았는가?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공민왕 친모 명덕태후이다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는 남양 홍씨 출신으로, 원나라와 무관한 고려 토착 권문세가였다. 그녀는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공개적으로 반감을 보였고, 특히 신돈을 향한 적대감은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여러 이유들로 공민왕과 사이가 안 좋았다. 아무리 친아들 이라고 해도 공민왕 말년 지나친 변태적인 행위가 명덕태후 눈에 심히 거슬렸을 것이다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은 명덕태후 조카 증손자였다. 이 혈연 관계 하나만으로도 시해사건 배후에
명덕태후 존재를 의심할 만하다.
더욱이 시해 직후 명덕태후는
공민왕의 죽음을 숨기며 “임금이 편찮다”고 전했고, 이인임·경복흥 등 실세를 불러 후속 대책을 논의 했다. 그녀의 침착한 대응, 호위병 공백, 홍륜과 친연, 이인임과의 정치적 연결고리까지 고려하면
이 사건은 단순한 궁중 살해가 아니라 고려 기득권층의 조직적 ‘정치적 암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추론의 근거가 되는 '고려사'는 공민왕 사후 불과 60여 년 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조선의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편찬됐다.
세종은 여러 차례 고려사 오류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그 역시 ‘전왕조의 역사’를 대하는 시선 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계속 의문을 질문하지만, 50년도 안 된 1979. 10·26도 여전히 미궁이다. 하물며 600여 년 전 고려 궁궐 비극이야말로 어찌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역사는 언제나 질문 위에 서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료의 단서와 인물 관계, 그리고 상식적 추론을 통해 가장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되어선 안 될 비극을
막기위한 최소한 성찰일 것이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