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8

변방 촌뜨기 이성계의 부상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8

ㅡ 조선건국의 서막 1 ㅡ

(변방 촌뜨기 '이성계'의 부상)


지난 2022년 대선, 윤석열후보는 손바닥에 큼직하게 ‘왕(王)’ 자를 쓰고 방송에 등장했다.


뜬금없고 기묘한 행보라는 비판이 잇따랐지만, 믿기 어렵게도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집권 후, 진짜 더 뜬금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정국을 뒤흔들었고, 그 대가로 탄핵당해 지금은 수감 중이다. 그 과정에서 윤석열·김건희 부부의 무속행위에 관한 각종 이야기가 무성하게 퍼졌다. 심지어 이를 풍자한 영화 <신명>까지 스크린에 올랐다.


사실, 무속과 '도참설'은 왕조시대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 깊숙이 스며 있었다.


특히 왕정시절, ‘도참설’은 민심을 움직이는 은밀하면서도 강력한 도구였다.


'도참설'이란 장차 일어날 중대한 사건을 상징·암호·언어 등을 통해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정감록'이 대표적 도참서였고, 고려시대에는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다.


‘十八子’를 합치면 ‘李’가 되니, 곧 “이씨가 나라를 차지한다”는 뜻 이었다.


이 예언은 고려 인종 대, ‘이자겸의 난’ 시기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이자겸이 왕위를 넘본다는 소문이거나, 반대로 민심이 그를 경계하며 지어낸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예언은 훗날 무신정변 주역 이자 고려 무신정권의 첫 집권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의방'과도 묘하게 맞닿는다. 이의방이 실제로 도참설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정권을 잡기도 전에 정중부 칼날에 쓰러졌다.


이의방에게는 ‘이린’이라는 친동생이 있었다. 형의 죽음 뒤 전주로 몸을 피한 이린은 그곳에 가문을 이었다.


그리고 2백여 년 뒤, 바로 그 이린 6대손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였다.


예언 속 ‘이씨가 나라를 얻는’ 순간이 200여년 장구한 세월을 넘어 현실이 된 셈이다.


이성계 조선건국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이성계가 낮잠을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고 “꼬기오” 하고 우는 장면을 보았다. 잠에서 깬 이성계는 곧바로 도력이 높다는 한 스님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전하며 해몽을 부탁했다.


스님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서까래 세 개를 지셨다면 장차 왕이 되실 것입니다.

등에 멘 서까래 세 개가 곧 ‘임금 왕(王)’ 자이기 때문이지요.

또 ‘꼬기오’를 한자로 쓰면 ‘고귀위(高貴位)’가 되니,

이는 가장 높고 귀한 자리를 뜻합니다.”


이에 감탄한 이성계가 말했다.


“대사께서 제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스님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삼인봉에 가면 제 제자인 무학대사가 있을 겁니다.

그를 찾아가 만나 보시지요.”


이것이 훗날 조선 건국의 도참적 상징이 된,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첫 인연에 관한 일화다.


비슷한 이야기는 현대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시절,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려면 국민 모두가 부처의 형상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리고 이내 10원짜리 동전 속 다보탑 중앙에 불상 같은 형상이 새겨졌고, 사람들은 “전국민이 부처 형상을 지니게 됐다”며 수군거렸다.

그리고 노태우는 진짜 대통령이 되었다. 실제로 10원짜리 동전을 들여다보면 부처 형상은 꽤나 또렷했다.


믿거나 말거나.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힘’과 그 힘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흐르고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무속이나 미신을 깊이 뿌리내려 왔기 때문에, 당장 한순간에 사라지기 어려운 문화적 토대가 있기는 하다. 그런 믿음이 있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지만, 특히 나라와 국민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정치같은 중차대한 영역에서 합리와 사실이 뒷받침 되지 않을 때는 정말 걱정 스럽고 불안하다. 더욱이 현직 대통령부부가 그런 무속에 빠져 있었다는 것은 어이없고 참담한 일이다.


이성계는 고려 말 권문세족들의 시선에서 보면, 그저 함경도 변방 에서 자란 촌뜨기출신 청년장교에 불과했다.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4년 10월 11일, 한길도 영흥군 흑석마을 에서 '이자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무렵 이곳은 원나라 땅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문 뿌리는 앞서 말한대로 멀리 전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왜 함경도라는 거친 땅에서 태어나게 되었을까?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성계 선조 한 분이 전주에서 살던 중 전주 관아 소속 기생과 눈이 맞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 기생이 당시 전주 수령이 최고로 아낀 여인이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결국 야반도주해 강원도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아니면 일부러 뒤를 쫓은 것인지, 그 전주수령이 새로 부임해 온 곳이 바로 그들이 숨어 지내던 지역이었다. 결국 이성계 선조는 또다시 북쪽으로 도망쳐, 여진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함경도 '함흥' 쪽에 정착하게 된다.


이 선조가 기생을 데리고 도망칠 만큼 배짱과 기개가 있었다면, 체격과 기력도 뛰어 났을 것이다.


우리나라 임금 초상화 '어진'에서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실제 이성계 어진 모습을 보면 조금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성계 얼굴은 대체로 강직하고 엄한 인상, 짙은 눈썹과 선 굵은 이목구비로 표현되어 있다.


함경도 변방출신이라는 점에서 토속적이고 건강한 체격에 강한 눈빛을 지녔다.


다만, 왕의 위엄을 표현하려다 보니 실제 모습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조선초기 기록(왕조실록 등)에는 이성계 키나 몸무게, 구체적 체격 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없다.


조선초기 남성 평균 키는 약 160~165cm 내외였다.


이성계가 특별히 크다는 기록은 없지만, 어진으로 추정해보면,

이성계는 무장으로서 평균 이상, 아마 165~170cm 정도로 추정한다. 단순히 ‘키가 크다’ 보다는 체력이 뛰어나고 근육질 튼튼한 체형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전주이씨 가문은 함흥 땅 에서 거친 기후와 전투적인 풍토 속에서 무인가문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함경도 북방은 원나라가 설치한 '쌍성총관부' 지배하에 있었다.


전주이씨 가문은 원나라 군·행정 관리를 맡아 이 지역을 다스리며 세력을 넓혔다.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추존왕 환조)은 원나라와 고려 양쪽에서 모두 이름을 알린 무장이었고, 함경도 동북방에서 원나라 선비족 출신 장수 '나하추'와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1350년대,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새로이 부상하는 '원명 교체기' 혼란 속에서 '공민왕'은 북방회복을 추진한다.


이에 이자춘과 그 아들 이성계는 '원'에 빼앗긴 지 100년 만에 쌍성총관부를 철폐하고 고려 옛 영토를 되찾는 데 핵심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이자춘은 고려조정 에서 벼슬을 받고, 이성계는 중앙 무대 진출 발판을 마련한다.


이성계가 스물다섯이 되었을 무렵, 왜구 침입이 극심해지자 조정은 함경도 최고병력을 보유한 이자춘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이자춘은 직접 나서지 않고, 아들 이성계를 대신 보낸다.

이때 이성계가 이끈 부대는 여진족·몽골족·한족 등 다양한 인종이 섞인, 그야말로 변방의 '다민족 용병대'였다. 중앙무장들 눈에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촌뜨기 ‘외인부대’일 뿐이었다.


고려사회에서 변방출신 장수가 아무리 전공을 세워도 권문세족의 벽을 넘기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름 한번 올리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달랐다.


평안도, 개경,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연이은 출정 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이름을 떨쳤다.


이성계 재능을 알아본 인물이 바로 '최영'이었다.


권문세가 출신이자 고려 최고 명장이었던 최영은 이성계를 아들처럼 대하며 후원했고, 함께 전장을 누비며 왜구를 격퇴했다.


이 시기 이성계는 뛰어난 무예, 과감한 지휘력, 그리고 최영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고려의 대표 무장으로 성장했다.


1370년대 후반, 이성계는 왜구 토벌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이성계의 전과를 살펴 보자.


1. 쌍성총관부 탈환전(1356) – 부자의 첫 대활약


배경 : 원나라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공민왕이 북방 수복에 착수.


전개 : 이자춘이 원의 관리였던 지위를 이용해 지역 정세를 장악, 아들 이성계와 함께 내부 세력을 설득·포섭.


전술 포인트 : 정면전보다 기습과 회유를 병행하여 큰 유혈 없이 함경도 일대를 고려로 편입.


결과 : 원에 빼앗긴 지 100년 만에 북방 회복. 이성계는 중앙 무대 진출의 발판을 마련.


2. 진포해전(1380) – 해·육 연계 작전


배경 : 왜구가 전라·충청 해안을 약탈하며 내륙 깊숙이 침입.


전개 : 최무선이 지휘하는 수군이 화포로 왜선 500여 척을 불 태우고, 이성계가 육군을 지휘해 해안에 상륙한 왜구를 섬멸.


전술 포인트 : 고려 최초의 해·육 연계 작전, 화포와 기병 운용이 절묘하게 맞물림.


결과 : 왜구 세력의 대규모 해상 침략이 사실상 종식.


3. 황산대첩(1380) – 기병 돌격과 지형 활용


배경 : 왜구 2만이 전라도 운봉 황산으로 침입.


전개 : 이성계는 3천 기병으로 출전, 협곡 지형을 이용해 적을 유인 후 포위 섬멸. 왜구 수장 ‘아지발도’ 전사.


전술 포인트 : 기병의 속도와 지형 통제 능력이 핵심. 보급로 차단과 유인전술이 빛을 발함.


결과 : 왜구 피해 최소, 전라도 지역 방어선 회복. 이성계의 명성 전국 확산.


4. 대마도 정벌(1389) – 본거지 타격


배경 : 잦은 해상 약탈의 근거지를 뿌리 뽑기 위한 원정.


전개 : 227척의 전선을 이끌고 대마도 상륙, 300여 명 사살, 100여 명 포로, 선박 100여 척 노획.


전술 포인트 : 신속한 상륙전과 화포 사용, 해안 마을 초토화로 장기간 억제 효과.


결과 : 대마도 왜구의 고려 침입이 몇 년간 현저히 줄어듦.


5. 여진족 토벌전(1387) – 북방 방어 완성


배경 : 함경·두만강 일대에서 여진족이 빈번히 국경 침입.


전개 : 이성계는 빠른 기동전을 구사, 강추위와 설원을 가로질러 기습 작전 전개.


전술 포인트 : 혹한기 작전 능력, 기병의 강행군, 현지 지형 완벽 숙지.


결과 : 여진족의 장기간 침입 억제, 북방 안정.


이 전투들을 통해 볼 때, 이성계의 전술 특징은 ① 기동성, ② 지형 활용, ③ 해·육 연계, ④ 심리전과 기습으로 요약된다.


이성계는 단순히 무예가 뛰어난 장수가 아니라, 변방의 복잡한 다민족 환경에서 길러진 종합 지휘관이었고, 이러한 역량이 훗날 '위화도회군'과 '조선건국' 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무장으로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 개경에 입성한 이성계는 자신의 한미한 출신을 보완하기 위해 명문 권문세가인 '강씨'와 정략 결혼을 맺는다. 이 강씨는 훗날 세자 '방석' 어머니이자 조선건국 후 '신덕왕후'가 된다.


강씨는 이성계보다 20세 가까이 연하였고, 개경 최고 명문가 출신 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이성계는 첫 부인 '한씨'와 사이에 장성한 여섯 아들을 두고 있었다. 훗날 조선 건국 초 비극의 씨앗이 되는 복잡한 가문사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의 부상은 단순한 무장으로 전공이 아니라, 변방에서 시작해 중앙 권력 핵심부까지 진출하는 드라마였다.


함흥의 다민족 군대 지휘관에서, 고려 최고 장수, 그리고 개경 권문세족 사위로까지 이성계는 이미 건국의 주인공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어서 '요동정벌' 파병과 '위화도 회군'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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