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ㅡ고려몰락과 조선건국 서막에 선 여인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7
ㅡ고려말 개혁과 좌절시대 12ㅡ
('기황후' ㅡ고려몰락과 조선건국 서막에 선 여인)
조선건국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 인물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리 역사 속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한 여성은 누구일까?
고구려와 백제 건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소서노'?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한 '선덕여왕'?
조선중기를 좌지우지한 '문정왕후'?
구한말, 국정을 농단하며 논란을 남긴 '명성황후'?
현대사에서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나 탄핵당하고 만 '박근혜'?
이들 모두 남성 중심사회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여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부터 소개할 인물과 비교하면, 모두 부차적인 존재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녀는 고려 출신이자, 당시 세계 최강국 원 제국 황후였다.
또한 원 황제 친모로서 실질적인 원 제국 최고권력자였다. 심지어 자신이 태어난 모국 고려왕위마저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다.
그 이름, 바로 <기황후>이다.
'기황후'는 고려 해주기씨 출신 이다. 그 시작은 초라했다.
기황후 정확한 생몰연대는 전해 지지 않지만, 14세기 원 간섭기 시절, 어린나이에 ‘공녀’로 선발 되어 원나라로 보내졌다.
당시 고려는 매년 원에 공물을 바쳐야 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공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 소녀들이 끌려가고, 그중 많은 소녀들이 절망 속에 목숨을 끊기도 했다.
국가에서는 공녀확보를 위해 금혼령까지 내려 전국에서 혼인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를 강제로 데려가기도 했다.
기황후 또한 이 가혹한 ‘공녀제도’ 희생양으로 원 궁궐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궁녀에 머물지 않았다.
빠릇빠릇하고 뛰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고려출신 환관 '고용보' 눈에 띄어 원 제11대황제 '순제'를 시중들게 되었고, 곧 황제 총애를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를 질투한 제1황후 '타나시리'에게 학대와 수모를 겪었지만, 역사는 곧 뒤집혔다.
타나시리의 오빠가 역모혐의로 처형되자, 타나시리도 폐위되고 기황후는 ‘귀비’로 책봉된다.
기귀비(기황후)는 1337년, 황제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은 후 그녀 위상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녀는 곧 황후 권한을 실질적 으로 장악한다.
궁궐질서를 잡는 ‘휘정원’을 개편해 ‘자정원’으로 격상시키고, 심복 고용보를 비롯한 고려 출신 관료와 환관들을 포진시키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해갔다.
기황후는 단지 황제의 여인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원 제국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다.
기황후는 고려정치에도 깊이 개입 한다.
기황후 오빠 '기철'을 비롯한 '기씨 일가'는 고려조정 고위관직에 오르며 친원파 세력 중심이 된다.
이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토지를 수탈하며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
기씨일가 전횡은 고려 내 반발을 불러왔고, 1352년에는 기황후 오빠 '기원'이 반란군에게 살해 되기도 했다.
1356년, 공민왕은 원 세력이 약화되자 기씨일가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반격에 나선다.
이로 인해 기황후 친정은 사실상 멸문되고 만다.
그무렵 고려에서 동지추밀원사를 지내던 '최유'가 고려에서 죄를 짓고 원나라로 망명해 기황후에게 공민왕을 폐하고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 '왕혜' 를 고려 왕으로 삼으라고 한다.
공민왕이 자신 일가를 멸문시킨 것에 분노로 가득찬 기황후는 남편 순제에게 공민왕을 폐하고 왕혜를 고려 왕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공민왕 고려는 예전 고려 가 아니였다.
1364년 1월 순제는 현 중국 타이쯔강 유역 랴오양성에 있던 원나라 군사 1만명을 동원하여 평안도 동주(선천)까지 남하하자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위사로 삼고 출전시켜 평안도 정주 '달천' 에서 전투를 펼쳤다. 이 전투에서 원나라 군사는 고려군에 크게 패 하고 철수했다.
1365년 12월 순제는 재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귀비를 황후로 책봉했다.
기황후는 이제 ‘황제 아내’가 아닌, 차기 황제 어머니, ‘황태후’로서 원 제국의 실질적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유한하다.
이즈음 중국대륙에서 한족반란이 격화되었고,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원은 북쪽으로 쫓겨나 ‘북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기황후 권력도 이시점부터 급속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황후 아들,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쪼그라든 북원에서 내분과 암투는 더 심화 되었고, 기황후는 점점 권력중심 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기황후 최후는 분명하지 않다.
궁중암투 속에서 사라졌다는 설,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는 설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황후는 민족의 자랑스러운 딸이었는가?
권력의 화신이었는가?
오늘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TV드라마는 기황후를 ‘민족의 딸’로 당당하고 정의로운 여걸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기황후는 민족을 위한 인물이라기보다는,
개인과 가문 권력을 위해 고려와 원 제국 모두를 이용한 권력가 였을 뿐이다.
기황후는 단순한 여성 권력자가 아니였다.
고려의 자주권을 붕괴시킨 상징,
그리고 고려말기 혼란과 외세개입 화신이었다.
기황후는 고려 왕을 세우고 폐위 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존재였고,
기황후 등장은 '고려몰락'과 '조선 건국'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조선건국은 단순한 체제교체가 아니었다
기황후 몰락이후, 고려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났다.
신흥무장세력 '이성계', 그리고 성리학을 중심으로 이상 정치를 꿈꾸던 '이색', '정몽주', '정도전'등 신진사대부들이 부상했다.
'조선'은 단지 무너진나라 '고려'를 대체한 것이 아니었다.
기황후를 포함한 고려후기 구조적 모순과 외세의존 결과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시도였다.
따라서 기황후 등장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오늘, 따로 한 편으로 기황후를 이야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황후는 ‘여성’이라는 이유만 으로 위대하거나, 비난받아야 할 존재는 아니다.
기황후는 고려와 원, 두 나라 정치 를 뒤흔든 강력한 정치 권력자 였으며, 그 권력궤적은 고려몰락 과 조선태동이라는 역사적 변곡점 만드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
고려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던 기황후 권력, 그리고 그 몰락 이후 파장까지 살펴보는 것은 역사를
읽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통찰이 될 것이다.
ㅡ 초롱박철홍 ㅡ
아래사진은 기황후 초상화라고 돌아다니는 것인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다음 사진은 당시 외국사절이 원황제와 같이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동그라미 부분이 실제 기황후로 추정되고 있다
어쨌든 두 사진에 나온 초상화 인물 정도로는 원 황제를 사로잡지는 못 했을 것 같다.
기황후 역을 맡은 '하지원' 정도 미모는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