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대통령 경자유전원칙 발언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5
ㅡ이승만 시대 '농지개혁' ㅡ
“이승만 대통령(이하 이승만)이 빨갱이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이하 이재명)이 25일 ‘농지 매각 명령’ 지시를 향한 비판에 대해
“농사짓겠다고 속이고 농지를 취득한 후 농사를 안 지으면, '경자유전 헌법원칙'을 존중하여 법에 따라 처분하게 해야지
않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재명은 특히 경자유전원칙을 헌법에 명시한 분은 이승만이라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경자유전 원칙에 따른 이승만 정부 농지분배는 대한민국 경제발전 토대가 되었다”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양민학살 등 여러 이유로 인정할 수 없으면서도 농지분배를 시행한 업적만은 높이 평가하는 이유”라고 밝혀 <이승만 농지개혁>이 다시 관심에 올랐다.
우리나라는 수 천년동안 농업중심 국가였다. 국가 경제활동에서 토지가 거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만큼 가지고 있는 토지를 빼앗아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아는 우리 역사 속 '토지개혁'은 고려말 '이성계' 세력 '정도전'과 '조준'이 중심 되어 고려 권문세가들 토지를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 바 있다. 이러한 '토지개혁'이 있었기에 이성계는 농민들 지지를 얻어 조선건국이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토지개혁은 완벽했다 할 수 없었다. 토지장부도 정확하지 않았고 당시 한반도 전체적으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단지 몇몇 권문세가 토지만 빼앗은 것뿐이었다. 이성계 일파 토지는 그대로 둔 채 말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진정한 '토지개혁'은 해방직후에 분단된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1945년 해방직후 한반도는 남북이 서로 다른 방식 토지개혁을 추진한다.
북측은 1946년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하여 단기간에 지주제를 해체했고, 이후 1958년 '집단농장체제'로 전환하였다. 초기에는 자기 땅을 소유하게 된 농민층 절대적 지지를 얻었으나, 궁극적으로는 개인소유가 인정되지 않는 구조로 귀결되어 제대로 된 토지개혁이라 할 수 없었다.
반면 남은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분배가 아니라,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는 체제 안에서 지주제를 해체하는 절충적 개혁이었다. 그렇지만 한반도 역사 속에서 처음 있는 엄청난 개혁이었다.
한 농가 소유 상한을 '3 정보'로 제한했고, 초과토지는 국가가 매입해 농민에게 분배했다. 지주에게는 '보상증권'을 지급해 자산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두었다. 이 방식은 사회적 충격을 완화하면서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물론 이때 '농지개혁'은 이승만 개인 단독결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미군정 시기부터 개혁논의는 이어졌고, 좌우이념 대립 속에서 농민층 요구도 강했다. 남북의 냉전구도 또한 개혁을 촉진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이를 국정 우선 과제로 삼고 정치적 타협을 이끌어낸 점은 이재명 말대로 분명한 이승만 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 농지개혁은 당시 여러 정치적, 사회적 상황 결과물이었다. 즉 당시는 이승만이 아닌 그 누구라도 농지개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시 정치지형은 우파정당이자 다수당이었던 '한국민주당' (이하 한민당)은 대지주세력이 기반이었다. 이승만은 한민당 지지로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한민당 소속 의원들 이해관계에 직접적 타격을 주는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사회주의 성향 좌파 정치인 '조봉암'을 과감하게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해 농지개혁 입법을 추진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한민당과 타협 속에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은 이승만 고도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이승만은 자기만의 정치세력을 확보하고, 국가안정과 농민층 흡수를 동시에 고려한 정치적 계산이 작용했던 것이다.
1950년 4월 농지분배가 본격화되었고, 6.25 전쟁 전까지 토지대장 열람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해방 직후 35% 수준이던 자작농 비율은 1950년대 초 90% 이상으로 상승했다.
이러한 농지개혁 제도 시행직후, 6·25 전쟁이 발발했지만, 최소한 남한의 다수 농민들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내 땅>을 갖게 되었다는 인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전시상황에서 남측 체제에 대한 지지와 정당성유지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 전쟁 이전에 단행된 농지개혁은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신의 한 수'가 된 선택이었고, 북측 침략에 맞서 체제를 방어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 했다 볼 수 있다.
또한 6.25 전쟁은 사회구조를 급격히 흔들었고, 지주계층은 경제적·사회적으로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농지개혁 실질적 안착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남한사회는 농지개혁으로 전통적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작농 중심 농지구조로 전환하였다. 또한 6.25 전쟁 거치면서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우리나라 신분제도도 이 시기에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었다.
나를 비롯해 6·25 전쟁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세대'는 역사 속 신분차별을 거의 체감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자본주의 체제 아래 자본에 의해 계층이 고착화되는, '새로운 신분제’가 형성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는 한국사 속에서 신분차별이 거의 없는 시기를 살아온 유일한 세대 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농지개혁 이후 산업화, 자본화과정에서 비교적 평등한 출발선을 형성하는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처럼 이승만 시대 농지개혁은 단순히 토지를 나눈 사건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형성된 대규모 지주중심 식민지농업 구조를 해체하고, 신분적·경제적 위계를 약화시킨 구조적 개혁이었다. 또한 농민 다수가 체제 내 이해관계자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안정의 기반도 되어 이승만 독재정권 10년을 이어가게 한 계기도 되었다.
이 농지개혁은 당시 다양한 정치 세력이해관계, 국제정세, 이념문제, 농민요구가 교차한 결과였다.
이 모든 공을 이승만 한 인물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이승만이 대통령 재임 중 이를 제도화하고 실행에 옮긴 공적 또한 분명하다.
이와 같이 이승만정부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구조적이고 파급력이 컸던 개혁 중 하나였다.
이승만은 이재명 말처럼 '공과 과'가 뚜렷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친일세력 비호, 민간인 학살, 독재 정치 등 여러 과오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농지개혁’이라는 공적만큼은 다른 사안들과 분리해,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할 필요는 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