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2차 침략 2 - 숨겨진 명장 ‘양규 장군’ 1)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9
ㅡ 고려거란전쟁 8 ㅡ
(거란 2차 침략 2 - 숨겨진 명장 ‘양규 장군’ 1)
얼마 전 약 27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화제가 된 사극 <고려 거란전쟁>이 방영 되었다.
우리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거란(요)이 고려를 침략한 사건은 대략 한두 번 정도로만 배우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침략을 막아낸 인물로 '서희'와 '강감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거란은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했으며, 그 가운데 특히 대규모 전면전은 세 차례에 걸쳐 벌어졌다. 이후에도 국경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적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며 북방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요나라는 '송나라'와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송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보다는 막대한 조공과 재물을 받는 방식으로 공존관계를 유지하였다.
그 결과 요는 중국 북부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며 송과 장기간 대립하는 국제질서를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요나라가 급격히 부상하던 시기는 동아시아 질서가 크게 흔들리던 시대였다.
역사를 돌아보면 중국대륙 왕조 교체기나 정치적 혼란기는 종종 한반도에도 큰 위기로 이어졌다. 고려 역시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거란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여러 차례 전쟁을 겪게 된다.
당시 동아시아 강대국이었던 '요'는 '송' 후방에 위치한 고려를 견제하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요 황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 이끌고 침략해 왔다.(요즘 학설은 40만 보다 훨씬 적은 6, 7만 설이 대세)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예상했던 것처럼 쉽게 무너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거란의 고려 2차 침략>은 고려에게 매우 큰 위기였지만, 동시에 여러 장수들이 놀라운 활약을 보이며 이를 버텨낸 전쟁이기도 했다.
거란 침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1차 침략' 때 외교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한 서희, '3차 침략' 때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을 떠올린다.
하지만 2차 침략 당시에도 놀라운 활약을 펼친 장수들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특히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인물이 바로 <양규 장군>이다.
당시 '양규 장군'을 비롯하여 여러 장수들 활약을 보면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수들 못지않은 용맹과 지략을 보여 준다.
우리는 중국 '삼국지' 속 장수들 이름은 비교적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 역사 속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장수들 이름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 역사 속 인물들이 대중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최근까지 '양규 장군'의 이름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를 살펴보면 그의 업적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양규 장군 활약을 간략히 살펴보자.
거란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거란 2차 침략 첫 번째 격전지는 강동 6주 가운데 하나였던 <흥화진>이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양규가 중군에서 용맹을 떨치며 군사를 지휘하니 그 위세가 돌과 화살을 압도하였다. 적을 추격하여 생포하니 그 힘으로 국토를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이 달아났고, 강궁을 당기면 적군이 항복하였다.]
— 고려사, 고려현종이 직접 내린 글 중에서 —
기록에 따르면 양규는 거란의 침략 당시 소수병력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잡혀가던 백성들을 구출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정리하겠다.
양규 초년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고려사' 에는 고려 목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형부낭중'에 올랐단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그는 대략 고려 성종 말년 또는 목종 재위 시기 무렵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북 국경지역을 총괄하던 '서북면 도순검사'는 바로 정변을 일으켜 목종 폐위시킨 '강조'였다.
양규는 강조가 정변 이후 개경으로 떠난 뒤 후임으로 흥화진 방어를 맡는 '서북면 도순검사'로 부임하게 된다.
정변 직후의 민감한 정치상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요충지에 부임한 것은 어느 정도 '강조'나 군 내부의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양규는 강조 휘하 장수로 등장 한다.
거란 2차 침략 결과는 흔히
<고려황제가 거란에 친조하고 강동 6주를 돌려주기로 하며 화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겉으로 보면 맞는 설명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거란 역시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거란 황제 요 성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지만, 첫 격전지였던 흥화진을 2주 넘게 공격하고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거란군은 이 요새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채 우회하여 개경까지 진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거란군은 상당한 보급 문제를 겪었고, 후방에 남아 있던 고려군의 기습과 저항에 계속 노출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양규'가 이끄는 병력은 여러 차례 기습공격을 통해 거란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란군 역시 체면을 유지하면서 철수할 명분이 필요했다. 황제가 직접 친정하여 왔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철수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려 역시 거란군을 완전히 몰아 붙이는 것이 반드시 유리한 상황만은 아니었다. 대군이 막다른 상황에 몰릴 경우 예상치 못한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은 형식적으로는 친조와 영토문제 포함한 화친이라는 명분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양규 활약이 없었다면 이런 화친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고려와 거란의 긴장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거란 고려 3차 침략>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은 <귀주대첩>이라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그 이전 단계였던 2차 침략에서 고려가 버텨내지 못했다면 이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양규 장군'과 당시 여러 장수들이 보여준 항전은 고려가 전쟁을 견디고 이후 반격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규 장군'의 이름은 '서희'나 '강감찬'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이 숨겨진 명장 '양규 장군'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 편에서는 <양규 장군>이 실제로 벌였던 전투와 그의 마지막 전투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