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0

고려거란전쟁 9 ㅡ숨겨진 명장 ‘양규 장군’ 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0

ㅡ 고려거란전쟁 9 ㅡ

(숨겨진 명장 ‘양규 장군’ 2)


<3,000명이 40만을 막았다>


믿기 어려운 이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고려 시대에 실제로 벌어진 사건으로 '고려사'라는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당시 동아시아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40만 대군이라는 숫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 병력은 약 6~7만 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압도적인 병력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수천 명 규모로 이에 맞서 싸워 이를 저지해 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장수가 있었다.


<양규장군>


우리는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매우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안시성전투'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중적으로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명장 중 한 명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즉, 양만춘은 후대기록이나 설화를 통해 형성된 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며 실존 여부조차 분명하지 않다.


반면 '양규'는 전혀 다른 경우이다. 그는 정사 '고려사'에 ‘열전’이 따로 실릴 정도로 행적이 분명히 기록된 실존인물이다. 특히 거란 2차 침략 당시, 적진 속에서 포로 수천 명을 구출하고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공로는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규' 이름은 오랫동안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실존 여부가 불확실한 '양만춘'이 더 널리 기억되고 있다는 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보다는 이야기로서 전달력과 상징성이 대중적 기억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최근 들어 TV드라마 대중매체를 통해 '양규'가 재조명되면서, 그를 '이순신'에 비견되는 영웅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등장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던 고려 전쟁사와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는 ‘누가 더 위대한 장수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인물이 더 강한 서사와 상징을 통해 기억되었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고려거란 2차 전쟁>


이 전쟁, 그냥 싸움이 아니었다.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었다.


이 전쟁시기를 거치면서 한반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더 뚜렷해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하나다”라는 감각이 피로 각인된 전쟁이었다.


또한 이 전쟁은 고려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상당히 선전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이후 약 600년 뒤 조선이 처절하게 겪게 되는 '정묘·병자호란'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1010년 11월, 거란황제 '성종'이 이끄는 40만 대군이 고려에 진입하며 가장 먼저 맞닥뜨린 곳이 바로 이 '흥화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약 일주일 동안 거란군 집중공격이 이어졌고,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이를 끝까지 방어해 냈다.


병력규모에 대해서는 사료 간 차이가 있으며 과장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고려군이 상당한 전투력을 보여준 점은 분명하다.


이 전투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도 전해진다. 양규장 군은 화살이 부족해 지자 허수아비를 이용해 적의 공격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화살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다. 사실 여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당시 상황의 긴박함과 전술적 대응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또한 고려군은 활 운용 능력에서 강점을 보였던 것으로 평가되며, 다양한 종류의 화살을 활용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또한 전투도중 거란은 고려포로를 처형하며 심리전을 펼쳤고, 양규 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양규는 이에 응하지 않고, 고려포로를 죽이는 장면을 보고 혀를 깨물어 입에 피가 고이는 극도의 분노 속에서도 끝까지 성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고 전해진다.


<고려거란전쟁 TV드라마>에서도 이 장면을 인상 깊게 그리고 있다.


결국 거란군은 여러 차례 공격에도 '흥화진'

함락시키지 못했고, 이 지역을 우회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거란의 이 판단은 이후 거란군의 작전전개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편 거란군은 남하하여 '통주' 일대에서 '강조장군'이 이끄는 고려군과 맞붙는다. 초기에는 고려군이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후 야전에서 '거란기병'과 전투에서 대패하며 강조는 포로가 된다.


이 과정은 '양규' 방어전과 자주 대비된다.


상대적으로 정예화된 3000 병력 운용한 '양규'와 달리 대규모로 급히 동원된 30만 '강조'병력은 전투력 유지에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록에 나타난 고려 강조의 30만 규모 병력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고려가 전쟁 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구조였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러한 병력은 질적 편차가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란은 통주전투에서 대승하고 포로로 잡은 강조를 참살하고, 항복을 권유한 강조의 서신을 위조해서 흥화진에 보내 '양규'를 회유하려 했으나 양규는 단 한 마디로 이를 거부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을 뿐이다.>


이 한 문장은 당시 고려 지휘체계 충성 기준을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자주 인용된다.


결국 '흥화진'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고, 거란군은 후방에 불안 요소를 남긴 채 남하를 계속해야 했다. 이 결과는 이후 전쟁흐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양규'활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 그의 진가는 더욱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다음 글에서는 고려의 숨겨진 명장, '양규장군' 후반활약을 이어서 살펴보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19화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