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2

숨겨진 명장 ‘양규장군’ 4 — 이름 없는 장수들과 들풀들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2

ㅡ 고려거란전쟁 11 ㅡ


(숨겨진 명장 ‘양규장군’ 4 — 이름 없는 장수들과 들풀들)


'양규장군'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경'(평양)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다. 성 내부에서는 이미 거란에 대한 항복론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통주전투' 이후 거란군 사절과 이미 내통하며 항복한 '노의' 등의 항복 설득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경성은 점차 항복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 통주전투 패배 이후, 갈 곳을 잃은 중랑장 '지채문'에게 '현종'은 서경으로 들어가 방어에 힘을 보태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이미 항복을 결정한 서경성은 지원군인 지채문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지채문은 '최창' 등 내부 협조자 도움으로 간신히 성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채문이 성에 들어왔다고 해서 서경성 분위기가 바뀌지는 않았다. 서경부유수 '원종석'이 끝까지 항복 방침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지채문과 최창 등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거란사절들이 군영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매복하여 그들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항복의 길 자체를 끊어낸 셈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성 내부 불안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탁사정'이 이끄는 동북면 군대가 도착하면서 상황은 점차 안정되었다. 고려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대응태세를 갖추게 된다.


한편, 고려조정은 시간을 벌기 위해 거란에 항복사절을 보냈고, 이를 신뢰한 거란 측은 서경점거 병력을 따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거란군 병력은 지채문과 탁사정이 이끄는 기병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 승리로 고려군 사기는 일정 부분 회복되었다. 지채문은 성 밖으로 나가 야전준비에 나선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지채문은 탁사정과 함께 거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다음 날 추격전에서 역습 당해 패주하고 만다. 지채문은 개경으로 돌아가 전황이 불리함을 알린다.


이 소식은 고려조정을 크게 동요시켰다. 병력 총동원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항복론이 다시 대두되었다.


이때 늙은 관료 '강감찬'만이 홀로 남하를 통한 회피를 건의하였다.


이런 복잡한 과정에서 지채문은 강감찬 남하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신이 재주가 부족하오나, 폐하 곁에서 끝까지 저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결국 현종은 몽진을 결정한다.


황제를 따르는 행렬은 극히 소수였다. 금군 50명과 황후, 후궁, 그리고 지채문·채충순 등이 전부였다. 이는 국가존망이 심하게 흔들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몽진과정은 험난했다. 현종은 거란군이 아니라, 오히려 고려 내부세력에 의해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았다.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 황제라는 점 때문에, 일부 지방세력은 그를 정통군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채문은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거의 혼자 현종을 지켜냈다. 현종을 굳게 호위하고, 뛰어난 활솜씨로 현종을 안심시키는 모습이 기록에도 남아있는 것을 보아 활만 잘 쏜 것이 아니라 젊은 왕에 대한 충성심도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현종이 지채문을 치하한 내용이 '고려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쓴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현종이 지채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 현종이 환도하여 토지 30 결 하사하며 벼슬도 높여주는 교지를 내렸다.


이처럼 지채문은 '제2차여요 전쟁' 때 '강조'에 의해 옹립된 젊은 황제 현종이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여러 번 구했다.


지채문은 국가붕괴 위기 속에서 황제를 지켜낸 핵심 인물이었다.


이 와중에 또 한 명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하공진'이다.


지채문은 현종을 보호하러 온 '하공진'을 우여곡절 끝에 만나 현종에게 데려왔다. 현종은 처음 하공진이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를 잡으러 온 고려군사로 알고 기겁을 했다. 그러나 지채문이 그럴 리 없다며 하공진을 만나 진심을 확인하고 현종 앞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이런 내용이 '고려거란전쟁' TV 드라마 에서도 자세히 나온다


현종이 하공진을 접견하고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하공진으로 하여금 거란군영으로 가서 화친을 요청하게 하였다.


하공진은 거란황제에게 당당하게 화친을 요청한다.


당시 거란황제 또한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개경을 점령했지만 현종을 놓쳤고,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다. 또한 후방거점 확보에도 실패한 상태였다.


이때 '하공진'이 나타난 것이었다. 거란성종이 '울고 싶을 때 뺨을 때려준 꼴'이었다.


하공진은 거란황제 성종이 처한 상황을 잘 알았다. 하지만 당시 고려군은 강조의 대패로 거란 20만 대군을 막아낼 여력은 없었다. 거란군이 막다른 곳까지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하공진은 먼저 거란황제 성종이 자기를 믿을 수 있도록 고려 고급 정보를 주고 거란황제 앞에서 별 아부를 다한다. 그리고 고려현종이 남쪽으로 멀리 달아나 잡을 수 없을 거라 했다.


거란성종은 고려현종이 달아난 거리가 얼마나 되냐고 묻자 하공진은 '수 천리'가 넘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고려지리를 잘 모르는 거란황제는 하공진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거란황제는 고려현종 잡는 것을 포기한다.


(참고로, 당시 거란군과 현종 일행 거리는 불과 10여 리였다. 하공진이 거란황제를 속이지 못했다면 계속 추격을 진행한 거란 최전방 기병이 현종 일행을 발견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대신 거란황제는 화친조건으로 <현종 거란황궁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했다.


하동진은 거란성종 요구에 웃음이 나왔다. 고려로서는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고려가 그랬다면 지금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그걸 요구하는 거란성종 급박함을 하동진은 꿰뚫어 보았다. 거란황제 성종은 고려가 말로나마 철수할 수 있는 명분을 주라는 것이었다.


"말로는 무엇을 못 하리"


하공진은 이런 상황을 편지로 써서 고려황제 현종에게 보냈다. 현종은 하공진 말대로 그렇게 하겠다 하고 거란과 화친 맺었다.


당연히 거란황제 화친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로서는 처음부터 고려대상도 아니었다.


'제3차 고려거란전쟁'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고려는 이를 알고 철저히 준비하기 시작한다.


대신 하진공은 거란에 볼모로 잡혀갔다. 하진공이 요나라에서 한 때 거란황제에게 신임을 받고, 결혼까지 하였지만 고려로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한다.


그런 하공진에게 거란황제는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권유하였으나 하공진은 이를 완강히 거절한다.


거란황제 성종이 “철수할 때 약속한 강동 6주의 반환과 고려 현종 친조를 왜 지키지 않느냐”라고 묻자, 하공진은 크게 웃으며 “그것을 믿은 당신이 어리석은 것 아니냐”는 식의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였다. 이에 격분한 거란황제 성종은 하공진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게 하였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간을 꺼내 씹게 했다고 한다.


'지채문', '하공진'이 두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 학창 시절 국사 시간이나 평상시에도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앞 편 주인공 '양규'와 '김숙흥'도

마찬가지이다.


'고려거란 2차 전쟁'(1010년)에서 <양규, 김숙흥, 지채문, 하공진>과 같은 비교적 덜 알려진 명장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단순히 ‘전쟁영웅 무용담’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 인물들에게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것들이 많다.


이외에도 <강민첨, 최유선, 이공수, 문공유> 등이 있었다.


강민첨 등은 '고려거란 3차 전쟁'에서 강감찬 못지않는 주역이니 거기서 다루겠다.


1010년, 고려는 두 번째 거란 침략이라는 국난에 직면했다.

거란의 고려침략 당시 개경은 함락됐고, 현종은 남쪽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 혼돈 속에도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이름 없는 들풀 같은 병사와 별 권력도 명예도 없는 숨겨진 장수들이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그들은 먼저 행동했고 나라와 집을 지켰다.


이들 행동은 단순한 군사적 영웅담 아니다. 나라가 무너질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책임을 짊어지고 행동한 자발적 애국심의 증거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국가적, 사회적 위기 앞에서

“내 일이 아니다”라며 물러서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묻는다.


“그래도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 이름 없는 방패들을 우리는 단순히 ‘영웅’으로만 기억할 수 없다.


백 년 뒤 이와 비슷한 전쟁, '임진왜란' 때에도 이름 없는 들풀들인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지킨다.


나라는 해준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 일어서는 들풀 같은 존재들, 참 이해하기 힘든 우리 역사 속 모습이다.


이처럼 우리 역사 속에는 나라 위기 때마다 스스로 떨쳐 일어나 나라를 구했지만 끝내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존재들이 있었다.


모든 역사는 '영웅'의 이름으로만 기록되지 않는다.


이름 없는 들풀, 그들을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시를 써 보았다.


**********************


ㅡ 들풀의 이름으로 ㅡ


초롱박철홍


천 년 전,

거란 화살이 하늘을 가르고

성벽 위로 불길이 타올랐다.

그때도 이름 없는 들풀이 일어섰다.


‘거란 침략’ 속에서

나라의 손길 없었지만

스스로 땅을 붙잡은 존재들.


수백 년 뒤,

바다와 산이 불타고

성문이 무너지는 소리 속에서

또다시 들풀이 일어섰다.

‘임진왜란’

이름 없는 의병들이

조국을 지키려 몸을 던졌다.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영웅이라 불리지 않아도,

왕의 기록에 남지 않아도,

나라를 지킨 손길은 바람처럼 남아 있다.


모든 역사가 영웅 이름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때론 들풀처럼,

조용히 떨치고 일어난

이들 숨결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오늘, 시를 쓴다.

그 이름 없는 들풀 이름으로...


*******************


조선은 수백 년 뒤, 병자호란을 겪는다. 하지만 조선사대부들은 '고려거란전쟁'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거란'이 '여진'으로만 바뀐 이름 앞에서 준비되지 않은 나라가 무너진 것이다.


반면 여진은 역사를 공부했고, 준비했다. 역사 이해와 대비가 국가운명을 결정한다.


이어서 600년 후 <병자호란과 비교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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