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13 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1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4
ㅡ 고려거란전쟁 13 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1)
우리는 학창 시절 국사시간에 '고려거란전쟁'을 얼마나 제대로 배웠을까?
학창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서희 외교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었다’,
‘강감찬이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식의 단편적인 지식이 전부였다.
심지어 '귀주대첩'조차 강감찬이
‘강 상류에 둑을 만들어 적을 수몰시켰다’는 전설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들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왜 거란은 고려를 침략했는가?'
'거란은 여진이나 몽골과 어떻게 다른 존재였는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어떤 구조 였는가?'
이러한 맥락이 빠진 채 사건만 암기하는 방식의 역사교육은, 국사를 하나의 시험과목으로만 축소시켜 버린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점수를 위한 역사’는 기억하지만, ‘흐름과 의미로서 역사’는 놓쳐버렸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교사문제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입시중심교육 구조 속에서 국사 역시 효율적인 평가도구로 소비되어 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역사교육 방향에 대한 성찰을 보다 냉철하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단 한 페이지로만 다뤄졌던 ‘고려거란 전쟁’을 주제로 약 20편 규모의 시리즈를 완성 중에 있다.
그만큼 이 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고려라는 국가 존립과 동아시아 질서에까지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이 전쟁 이후 동아시아는 고려·송·거란(요) 삼국 간 균형 속에서 안정된 질서로 재편되었으며 100년 이상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거란전쟁'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우리 역사 속 역사적 전환점으로 바라볼 여지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은 오랫동안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최근 'TV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통해 점차 알려지고는 있지만, 그 이전까지 이 전쟁 속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대중 기억 밖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앞 서 ‘숨겨진 명장’ 편에서 언급했듯, 우리 기억 속에 자리 잡지 못한 장군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대표적 사례인 '양규 장군'조차도, 드라마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었을 것이다.
고려거란 2차 전쟁은 확실한 승패 없이 거란군이 '고려황제 친조와 강동 6주 반환' 이라는 명분으로 철군했다.
철군 이후에 거란은 고려에 대해 약속이행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고려는 그 약속을 이행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2차 전쟁 당시, 고려와 거란은 모두 궁지에 내몰려 잠시 숨을 고를 여유가 필요했다. 그런 만큼 3차 전쟁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수순처럼 예정되어 있었다.
고려는 거란과 약속이행을 여러 사정을 들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는 외교적 완충을 확보하고 재침략에 대비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긴장상태는 약 8년간 이어졌다.
결국 인내의 한계에 이른 거란은 다시 군사행동에 나선다.
거란군은 압록강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하며 재침략 준비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흥화진'(현재 의주일대)을 둘러싼 공방전 등 양측사이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고, 이는 점차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갔다.
마침내 거란은 총사령관 '소배압'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와 협상을 벌였던 소손녕 형)이 지휘하는 10만 군사를 동원하여 1018년 12월에 전면적으로 고려를 다시 침략한다.
이것이 '고려거란 3차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드디어 '강감찬'이 등장한다.
우리 대부분은 '귀주대첩'과 함께 '강감찬장군' 이름은 들어 봤을 것이다.
강감찬 '귀주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 '살수대첩', 조선 이순신 '한산도대첩'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상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강감찬 귀주대첩에 대해 많은 분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떤 전쟁에서 어떤 상대를 어떤 방법으로 대승했는지 조차도 잘 모른다.
강감찬도 이름만 알고 있지 그 생애에 대해서도 거의 무지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강감찬과 귀주대첩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흔히 ‘강감찬 장군’이라고 부른다. 이순신처럼 무인출신에 체구가 위풍당당한 전형적 장군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강감찬은 키도 작고 몸도 왜소했다 한다. 또한 실제 강감찬이 ‘장군’으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3개월뿐이었다. 그것도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맡은 역할이었다.
강감찬은 무장이 아니라 문과에 급제한 문신으로 평생을 관료로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인물이 장군이 되어 역사에 남을 대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70세라면 오늘날 기준으로도 군 지휘를 맡기기 어려운 나이다. 이미 은퇴해 여생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구나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평균수명 40세도 채 되지 않던 고려시대 문과출신 관료가 70세에 장군이 되어서 ‘귀주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둔 사실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강감찬은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다.
강감찬은 30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오랜 기간 지방관직만 전전했다. 그리고 60세가 되어서 비로소 ‘예부시랑’이라는 자리에 오른다.
고려시대 예부시랑은 문관 인사와 훈봉 등을 담당하던 정 4품 관직으로 오늘날 치면 행안부 과장급 정도에 해당한다.
과거에 급제한 뒤 30년 넘게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그 정도 직위에 머물렀다는 점은 그의 성품과 처세를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모습은 드라마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강감찬 아내가 답답함을 토로하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다소 잔소리가 많은 모습은 소크라테스의 ‘악처’ 일화와도 비슷하다. 드라마일 뿐이지만 그래도 늘 정성껏 식사를 챙기는 모습에서는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공처가 이미지로 유명한 배우 '최수종'이 강감찬 역을 맡으면서 이러한 인간적인 면이 더욱 잘 살아난 거 같다.
어쨌든 강감찬은 오랜 지방생활을 마치고 중앙관직 요직에 진출하면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한다.
특히 강감찬은 거란 2차 침략에 절대 항복해서는 안된다면서, '강조의 정변'으로 갑작스럽게 황제에 오른 '현종'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일반적으로 은퇴를 고려할 나이에 중앙요직 차지하고, 나아가 70세가 넘어 오늘날 총리 격인 '시중' 자리까지 오른 것은 현종과 깊은 신뢰관계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어서 ‘강감찬 2’에서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