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5

고려거란전쟁 14 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5

ㅡ 고려거란전쟁 14 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2 )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대비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고려사절요'에 실린 '강감찬' 졸기 사관의 평가이다. 이 짧은 문장은 당대 사람들이 강감찬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강감찬에게는 이른바 ‘문곡성 강림설화’가 전해진다. 문곡성은 북두칠성 가운데 하나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인데 훗날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더니 여기서 뵙는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강감찬을 비범한 인물로 인식한 후대평가가 반영된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강감찬의 외모에 대해서는 비교적 일관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그를

[키가 작고 풍채가 볼품없었으나,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러 설화에서도 강감찬은 남루한 차림으로 과거에 응시해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실력으로 인정받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는 단순한 외모 비하라기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여긴 ‘겸손하지만 내면이 강한 선비상’이 반영된 서술로 이해할 수 있다.


강감찬은 검소하고 청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강감찬이 재물을 모으기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인색하지 않았고, 개인생활은 소홀한 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흔히 ‘청백리적 성향’으로 평가되지만, 한편으로 매우 원칙적인 성격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강감찬 관직생활도 매우 특이한 편이다.


983년(성종 2년), 36세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했지만 1009년(목종 말년)

'예부시랑'에 이르기까지 약 30년 동안 두드러진 기록 거의 없다.


이는 일반적인 출세경로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인데, 강감찬 강직한 성향이나 정치적 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시기 그를 발탁한 인물이 바로

'최항'이다.


최항은 고려 대표적 유학자이자 관료로, 인재를 발굴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 강감찬을 예부시랑으로 천거하면서, 강감찬은 비로소 중앙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점에서 최항의 추천은 강감찬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항상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거란의 2차 침략 당시, 조정내부에서는 '항복론'이 적지 않았고 최항 역시 현실적 대응을 주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반면 강감찬은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며 현종의 몽진을 건의한다.


이 대립은 단순한 두 사람의 개인 갈등이라기 보다 당시 고려조정이 처한 위기 속에서 나타난 전략적 판단 차이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후 젊은 현종이 강감찬 말대로 몽진길에 나서고, 우여곡절 끝에 거란 2차 침략을 막아내고 나서부터 강감찬 출세길이 트였다.


'고려거란 2차 전쟁' 당시 항복론을 외치던 문관과 무관들, 심지어 도망갔던 신하들이 모두 처벌되었는데, 항복을 반대했던 강감찬은 현종과 몽진길을 동행한 것도 아니고, 따로 처벌받은 기록도 없는 것을 보면, 강감찬은 현종 명을 받아 다른 임무를 띠고 파견 갔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란고려전쟁'이라는 TV드라마에서는 강감찬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붙잡혀 고문당하며 커다란 역할등을 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역사적 기록에는 전혀 없는 이야기이다. 드라마적 상상력에 의해 쓰인 이야기 일뿐이다.


어쨌든 국난을 극복하게 되면서 강감찬 위상은 크게 높아진다.


1011년 이후 강감찬은 빠르게 요직을 거치며 <국자좨주, 한림학사, 중추사, 이부상서> 등 핵심관직을 맡게 된다.


특히 70세에 가까운 나이에 최고위 관직 '시중'(현 국무총리)에 오른 점은 그가 전형적 대기만성 인물임을 보여준다.


강감찬은 1018년(현종 9년) 5월에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그가 중앙 고관직을 받음과 동시에 '서경유수'를 겸했던 것을 보면 거란의 대규모 침략에 확실하게 대비하기 위한 인물로 낙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사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을 때 현종이

직접 임명교서를 써 주었는데 아래와 같다.


[경술년에 오랑캐의 전란이 있어서 적들이 한강(漢江) 변까지 깊숙이 침범해 왔다. 당시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 가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


ㅡ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ㅡ


'현종'이 이렇게 친히 교서를 써서 신하의 공적을 찬양한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는 것은 '양규'와 '강감찬' 둘 뿐이다.


여기서 현종표현은 공자가 관중을 찬양한 논어 헌 문 편 표현인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는 공자의 말에서 그대로 인유한 것이라서 현종이 강감찬을 얼마나 각별히 여겼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10월 '서북면행 영도통사'가 되어 사실상 군사전권을 받게 된다. 실제로 같은 해 거란장수 '소배압'이 침략하면서 '제3차여요 전쟁'이 발발한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평생 문신으로 살아온 70 넘은 노관료에게 국가존망 기로에서 '최고군사지휘권'을 맡기는 순간 이기 때문이다.


아마 강감찬에게는 문신이지만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특출한 모습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강감찬은 이후 '귀주대첩'이란 대승을 거두며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큰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된다.


기록에 따르면 전쟁 이후 풍년이 들자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이 모든 것이 강감찬의 덕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역시 사실여부를 떠나, 강감찬이 당대 민심 속에서 ‘구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현종과 강감찬의 관계이다.


현종은 직접 교서를 통해 강감찬 공을 찬양했다. 이는 매우 이례적 일이었다. 이러한 기록은 강감찬에 대한 현종의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뛰어난 인물이 자신 역량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를 알아보는 시대와 군주를 만나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강감찬은 그러한 조건이 딱 맞아떨어진 보기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와 이순신 관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강감찬은 단순한 명장이 아니라 '늦게 빛난 관료', '원칙을 지킨 지식인', '위기 속에서 능력을 증명한 전략가'라는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드디어 강감찬이 우리 역사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 왔다.


이어서 강감찬 3편, <강감찬과 귀주대첩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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