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15 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3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6
ㅡ 고려거란전쟁 15 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3 )
전쟁은 국경에서 시작되지만, 승패는 이미 준비에서 갈린다.
외침 앞에서 국가가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고 대응하느냐는 단순히 전쟁 결과를 넘어,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정치·사회 구조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고려의 거란 3차 침략과 조선의 정묘호란,
병자호란은 모두 북방 세력의 침입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조선은 외교와 군제 준비 한계로 큰 피해 입었지만, 고려는 위기를 학습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장기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려와 조선의 비교는 앞 편에서 한 편으로 자세히 정리한 바 있다.
이미 1차(993), 2차(1010) 침략을 겪은 고려는 전쟁 양상을 체득하고 있었다. 거란이 '고려 왕 친조', ‘강동 6주 반환’과 ‘송과 외교단절’을 요구하며 세 번째 침략을 준비했을 때, 고려는 충분히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총사령관 '강감찬'을 중심으로 한 고려조정은 거란군 유인, 보급로 차단이라는 결정적 타격전략을 수립했다.
이는 결국 귀주에서 대승으로 이어졌다.
'강감찬'은 문신출신이었지만, 전시에는 탁월한 군사판단과 통솔력을 발휘했다. 고려군 또한 국경방어선 정비, 보급망 구축, 병력재편 등 전쟁 준비를 체계적으로 마쳤다.
전쟁 이후에는 천리장성을 축조하며 국방을 제도화했다.
이처럼 고려는 위기를 학습 대비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했고, 이후 오랜 기간 안정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쟁 승패는 단순히 병력이나 무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위협을 어떻게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느냐 이다.
그럼 '고려거란 3차 전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앞 편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려거란 2차 전쟁 당시, 고려 '현종'은 시간을 벌기 위해 거란 황제에게 친조를 약속했고, 거란은 철수했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 성과가 없는 철군이었다. 당시 거란군은 보급로가 끊기고, 고려장수 '양규' 등 활약으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고려 역시 거란군을 완전히 격퇴할 힘은 부족했기에 거란에 명분을 제공하며 상황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군이 철수한 이후 1012년, 거란은 고려현종이 친조 약속을 지키지 않자 '강동 6주'를 돌려받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1014~1017년, 이 5년 동안 거란은 5차례나 국지전을 벌여 고려를 압박해 왔다.
고려는 거란의 재침을 예측하고, 약 8년 동안 철저히 대비했다.
이 철저한 준비가 3차 전쟁에서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1019년 '거란 제3차 침략' 당시 '서북면행 영도통사'로 임명된 강감찬은 곧 '고려군 총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한다.
우리가 아는 문신 강감찬이 드디어 장군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거란 제3차 전쟁'에 본격 들어가기 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이 전쟁이 '귀주대첩' 한 번으로 끝난 전쟁으로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1018년 12월 초, 거란이 '소배압'을 도통으로 삼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인 고려침략을 시작했다.
1018년 12월 10일, 흥화진 동쪽 삼교천 계곡에서 대장군 '강민첨'이 12,000명의 기병으로 매복 기습하여 거란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전투에서 수공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018년 12월 중, 대장군 강민첨 이 14,000명 기병으로 '자주'
(현 평남 순천군 자산면)의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크게 패배시켰다.
1018년 12월 중, 시랑 '조원'이 '마탄' (평양시 승호구역 봉도리)에서 거란군 1만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강감찬은 1018년 12월 말 '김종현'에게 정예기병 1만을 주어 남하시켰고, '동북면병마사'에게도 정예기병 3300을 주어 남하시켰다.
1018년 12월 26일, 현종이 개경에 계엄령을 내리고, 주변 일대에 '청야전술'을 폈다.
여기서 <청야전술>에 대해 알고 넘어가자.
'청야전술'(淸野戰術)은 적의 침입이나 진격을 막기 위해, 자기 지역의 농작물·식량·가옥·우물 등 생존과 보급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스스로 파괴하거나 이동시키는 전략이다. 말 그대로 '들판(野)을 깨끗이(淸) 만든다'는 뜻에서 나온 용어이다.
목적은 적이 그 지역을 점령하더라도 식량과 물자를 얻지 못하게 하여 작전 지속 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다.
'고구려'가 수ㆍ당 침략 시 많이 사용했던 전술이다.
이 전쟁이 고려 국가의 존망을 건 싸움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1019년 1월 3일, 거란군이 신은현(황해도 신계군) 평야에 이르러 진을 폈다.
1019년 1월 4일, 거란군이 '야율호덕'을 보내 거짓으로 철군하겠다고 알리며 300기의 군사를 금교역( 황해북도 금천군) 협곡에 숨겨, 개경 경계가 완화될 경우 성에 잠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현종은 이에 속지 않고 야간에 이들을 역으로 기습하여 전멸시켰다.
이에 소배압은 연이은 패배와 고려 청야전술 과 배후에 있는 강감찬 20만 대군에 커다란 위협 느끼고 거란으로 철수를 결정한다.
그리고 거란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귀주대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윗글에서 보다시피 이 전쟁에서 강감찬 못지않은 활약을 한 장군이 있었다.
강감찬 총사령관 바로 밑에 있는 대원수 '강민첨 장군'이다.
'강민첨 장군'도 무관 아닌 문관 출신이지만 '고려거란 2차 전쟁'때부터 장군으로 참전을 했다.
강민첨 장군은 '고려거란 2차 전쟁'에서도 평양성 사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평양성을 버리고 달아난 장수를 대신하여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하고 '서경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거란과 3차 전쟁 때는 야전에서 싸움 대부분 승리는 야전경험 많은 강민첨 장군에 의해 이뤄졌다.
이처럼 강민첨 장군은 강감찬 장군에 못지않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고려거란 3차 전쟁' 공은 거의 전적으로 강감찬 장군에게만 돌아갔다. 그 결과 강민첨 장군은 우리의 기억 속에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
얼마 전 방영된 '고려거란전쟁' TV드라마에서는 강민첨 장군이 활약하는 장면이 상당히 나온다. 그러나 강민첨 장군 역을 맡은 탤런트는 이름도 잘 모르는 TV나 영화에서 조연급으로 자주 보이는 분이 맡았다.
이는 아쉬운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있다.
'수공'(水攻)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학창 시절 배운 대로 '귀주대첩'과 '살수대첩'을 ‘대규모 수공'으로 기억한다.
즉, 상류에서 물을 막았다가 적이 강을 건널 때 터뜨려 대군을 몰살시켰다는 이미지다.
하지만 1차 사료 기준으로 보면 이 인식은 과장되거나 잘못 전해진 것이다.
실제로 역사기록에 수공이 명확히 언급되는 사례는 '강민첨 장군의 흥화진 전투' 뿐이다. 이 전투에서 소가죽 등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물 흐름을 조절한 기록이 있다. 이는 적의 도하를 방해하는 수준 보조전술에 가까웠지 대군을 일거에 쓸어버릴 정도 대홍수는 아니었다.
'살수대첩'에 대해서도 <삼국사기, 수서, 당서> 등 주요 1차 사료 어디에도 ‘인위적 수공으로 대군 수몰시켰다’는 내용이 없다.
즉, 이 전투 승리는 수공이 아니라 도하 중인 적의 취약한 순간을 노린 기습과 전술적 우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상식적으로도 완전무장한 수만~수십만 병력을 인위적으로 일거에 쓸어버릴 정도 수공은 현대 토목기술로도 구현이 불가능 하다.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홍해이야기'처럼 상징적· 신화적 서사에 가까운 설정이다.
수공이미지가 우리 기억 속에 상징적으로 남은 이유는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1948년 책으로 출간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서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을지문덕' 지시로 고구려군이 모래주머니로 상류를 막아 놓았고,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로 뛰어들었을 때 이를 터뜨려 몰살시켰다고 되어 있다.
'신채효' 선생은 민족주의자로서 '을지문덕' 신묘한 전략과 고구려 군의 좀 더 극적인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썼던 거 같다.
이후 우리나라에는 '살수대첩'이 수공이라는 것이 정설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귀주대첩' 수공도 강민첨이 흥화진 전투에서 소가죽을 이용한 부분적 수공을 강감찬의 대승리 요인으로 확대시켜 버린 것이다.
귀주대첩도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수공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거란족 역사서인 '요사' 고려열전에
[개태 7년(1018년)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소배압이 고려와 다하및 타하디 하천 사이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익사한 자가 많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양측 모두 배수진을 하고 싸웠는데 불리해진 쪽은 도망칠 때 물에 빠져 숨진 것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 편에 이 전투 자세한 상황을 정리하겠다.
이처럼 우리 역사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도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살수대첩'이나 '귀주대첩'하면 소가죽이나 모래주머니로 댐을 막아 적군이 건널 때 터트려 수몰시켜 죽이는 장면이 너무 극적이다 보니 소설 드라마 영화 만화 등에서 사용하다 보니 우리는 그런 장면을 고정관념화 시켜왔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허황된 영웅적 서사 이야기보다 진실된 역사를 마주해야 한다.
이어서 <귀주대첩 대승리와 그 의의>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