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16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4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7
ㅡ 고려거란전쟁 16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4)
3차례에 걸친 '고려거란전쟁'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시기의 ‘고려’는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단지 이름만 '고구려'에서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 단단해지는 군사적 대응력과 전략적 사고 또한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살수대첩'이 수나라의 몰락에 큰 타격을 주었다면, '귀주대첩'은 거란의 대외 팽창 정책에 중요한 제동을 건 전투로 평가된다.
이 전투는 흔히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고려거란 3차 전쟁'은 단순한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 전반에 걸친 전략적 대응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전쟁초기 고려군은 거란군 기선을 제압했고, 거란군 기동 전에 대비해 '청야전술'과 '유격전'을 병행했다. 그리고 마지막 국면에서 귀주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로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은 우연이라기보다, 비교적 치밀하게 준비된 대응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거란장수 '소배압'은 2차 침략의 '흥화진' 경험을 교훈 삼아 중간 거점을 무시하고 곧바로 개경으로 돌진하는 전략을 택했다.
보급은 현지 조달에 의존하고, 퇴로 확보보다 속도를 중시하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고려조정, 특히 강감찬과 현종은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청야전술로 식량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거란군은 개경 진입에 실패한 채 퇴각을 선택하게 된다.
퇴각 과정에서도 거란군은 고려군 유격전술에 지속적인 압박을 받았다.
강민첨의 기병은 청천강 일대에서 거란군을 공격하며 피해를 입혔고, 해안로 역시 차단되면서 거란군은 내륙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강감찬은 이 점을 예측하고 마지막 결전지로 '귀주'를 택한다.
1019년 2월 1일,
귀주 평원에서 양군이 마주한다.
강감찬부대가 숫적으로는 두 배나 많았지만 주변여건 상황은 거란군 보다 불리한 상황 이었다.
고진군은 거란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검차' ('공격거란전쟁' 드라마에서도 검차를 복원해서 첫 회에 나왔다. 기병을 저지하기 위한 장갑차 비슷 )를 동원했다.
귀주벌판에서 대혈투가 시작되고 양측의 끊임없는 공방전이 지속된다. 검차를 동원한 고려와 이를 뚫으려는 거란기병의 한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초반 싸움에서 강감찬 고려군이 많이 밀리고 있었다.
이때 고려군 1만 정예기병이 거란군 뒤쪽에서 나타났다.
이 기병대는 개경이 위험하다 해서 강감찬이 개경을 도우라며 개경으로 미리 보내진 '김종현'장군 1만 기병이었다.
그런데 거란군이 철수했다는 소리를 듣고 김종현장군은 다시 귀주로 향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거란군보다 먼저 도착했어야 했는데 늦게 도착했다.
이것이 강감찬의 전략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늦게 도착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게 강감찬에게는 신의 한 수가 되어 버렸다.
뒷 걱정을 안 하려고 배수진을 치고 고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거란군에게 후미에서 생각지도 못 한 고려기병 1만 명이 갑자기 등장하니 거란군은 당황해 혼비백산을 한다.
이 1만의 기마부대는 거란군 후미에서부터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 거란군 진열을 헤집어 놓게 된다.
이때 또 하늘도 고려군을 돕는다.
북쪽에서부터 불던 강한 바람이 남풍으로 바뀜과 동시에 소나기까지 내리게 된다.
즉 바람방향이 고려군 쪽으로 불다가 거란군 쪽으로 향해 불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고려군이 쏜 화살이 두 배정도 더 멀리 간다.
게다가 평안도 벌판에 2월 추운 날씨에다 소나기까지 내리고 강한 바람까지 거란군을 향해부니 거란군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앞에서는 강한 비바람, 뒤에서는 고려군 1만 기병이 몰아치니 거란군 진형은 혼비백산하고, 수습불가 상태로 무너져 버리고 만다.
거란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다.
이때 대원수이자 부원사인 강민첨 고려군 별동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반령'(귀주벌판) 으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결국 이 전투는 포위섬멸전으로 마무리되어 갔다.
포위섬멸전에서는 일반적으로 포위된 쪽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거란군 10만 명 가운데 살아 돌아 간 이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수치는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거란군 총사령관 '소배압'은 갑옷까지 벗어던지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 났다. 하지만 거란군은 최고위급 부대 지휘관 4명이 죽을 정도로 고위계층 장수 손실도 컸다.
보다시피 귀주대첩에서 수공은 전혀 없었다.
단지 거란군이 배수진 쳐놨다 보니 피할 데 없어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은 부지기 수 였다. 강을 뒤덮을만했다.
어쨌든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고려군 대승 중 대승이었다.
'귀주대첩' 대승은 단순한 전투 승리를 넘어선다.
이 승리 이후 고려와 거란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크게 줄어들었고, 동아시아 국제질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균형 상태로 들어간다.
물론 완전한 평화였다기보다는
긴장 속 안정에 가까웠지만, 상당 기간 큰 전쟁이 억제된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 <북송, 요나라, 고려, 서하> 등 4개국 평화균형체제는 120년 후, 여진족인 '금나라'가 흥기 하여 '요'와 '북송'을 공격할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승리를 이끈 강감찬은 전형적 무장은 아니었다. 문신으로 출발했으며 전쟁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상황판단과 전략 수립, 그리고 인재활용 능력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귀주대첩' 역시 강감찬 혼자 만든 승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대전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당시 최고사령관 이름만 역사에 남는다.
귀주대첩도 강감찬 이름만 남았다.
역사에 이름을 길이길이 남긴 '강감찬'은 대기만성형으로 정말 말년 복도 크게 받은 사람이었다.
강감찬이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
라며 칭송했다.
이를 고려현종은 조선선조처럼 시기질투하지 않고 강감찬을 끝까지 구국영웅으로 모셨다.
'이순신'이 선조 시기질투 때문에 마지막 전투에서 죽음을 택했다는 '자살설'까지 나도는 것에 비교해 보면, 현종과 강감찬의 관계는 끝도 아름다웠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이 이후 10년 동안 말년 복인답게 편히 살다 84살까지 천수를 누렸다.
강감찬은 문관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다. 84년 간의 긴 일생 동안 갑옷 입은 건 제3차 고려거란전쟁 때 3개월뿐이었다.
강감찬뿐만 아니라 강민첨, 서희 등도 문신출신이다.
고려문신과 조선문신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강감찬이 거란을 물리친 후 고려는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100여 년 간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가 되었다.
한국사에 드문 오랜 평화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어서 '고려거란전쟁' 마지막 편, <고려문신과 조선문신의 차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