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17 ㅡ 고려와 조선 문신들의 차이)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8
ㅡ 고려거란전쟁 17 ㅡ
(무장출신도 아닌 늙은 장군 강감찬 5 - 고려와 조선 문신들의 차이)
'강감찬' 장군이 70대 나이에, 그것도 문신출신으로 고려군 총사령관이 되어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강감찬을 전형적인 무장출신 장군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우리에게 고려의 유명 장군으로 알려져 있는 귀주대첩 '강감찬' 뿐만 아니라 '강민창장군',
강동 6주 획득 '서희', 여진정벌 별무반으로 유명한 '윤관', 묘청 난을 진압한 '김부식', 고려 난신 '이자겸' 등도 모두 문신출신이었다.
이처럼 고려는 무과제도 없는 '음서제도'(고위공직자 자녀 관리로 임용)로 인해 무신보다 문신의 정치적 위상이 높았다. 이들은 외교뿐 아니라 군사문제 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직접 지휘를 맡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세종'시절에 '김종서'가 문신출신으로 4군 6진 개척한 유명한 장군 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 '권율' 장군도 문신으로 출발하긴 했다. 하지만 문신이 장군이 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이었다.
"문신이 장군이 되다!"
이 말은 고려에선 자연스러웠고, 조선에선 예외적이었다.
왜일까?
이는 단순히 개인능력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만든 제도차이에서 비롯된 구조적 결과이다.
그 핵심은 ‘문무관계’와 ‘무과제도' 유무에 있었다.
좀 더 자세히 그 구조적 상황을 살펴보자.
1. 고려: 문무가 비교적 유연했던 체제
고려는 건국초기 ‘호족연합체’ 성격이 강한 국가였다. 이 과정에서 문과 무의 구분이 조선이나 오늘날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또한 고려에는 조선처럼 체계적인 '무과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군사인력은 공훈, 천거, 음서 등을 통해 선발되었고, 고위문신이 군사지휘권까지 겸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군사 관련 기구인 '도병마사'나 '중추원' 역시 문신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고, 문신이 병마사로 파견되어 지역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즉, 고려 문신은 단순한 행정가 라기보다 외교·행정·군사를 함께 다루는 종합적 관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보면, 강감찬 이 고령 문신임에도 총사령관이 된 것은 특이한 사례라기보다 당시 체제 안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2. 조선: 문무 분리가 제도화된 사회
조선은 건국부터 '문무분리' 시대였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무신 출신이었지만 조선건국 설계자 '정도전'은 완벽한 문신 이었다. 이때부터 문무구별이 뚜렷했다.
또한 조선태종 '이방원'도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한 문신출신이었다.
그는 사병을 혁파했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군제개편을 추진하면서 무관선발을 제도화하기 위해 정식 '무과제도'를 시행했다.
이때부터 조선에서는 확실하게 <문신은 정무를, 무신은 군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 국교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이념체계는 '문'과 '무'를 명확히 분리했고, 조선 문신은 철저히 ‘정책결정자’ 또는 ‘행정가’로서만 기능했다.
군사권한이 필요할 때에도 문신은 '병조'나 '비변사'를 통해 군정(軍政)을 관리했을 뿐, 실제 병력지휘(군령)는 무관이 담당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조선에서도 문신이 장군으로 나선 사례가 전혀 없진 않았다. 대표적 예외가 '김종서'로, 함경도 여진 방어를 총지휘했다.
'권율' 역시 문신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군 총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조선 전체 구조는 기본적으로 문무분리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3. 두 체제의 차이: 통합 vs 분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는 문무역할이 비교적 유연하여 문신이 군사까지 포괄 가능 했고, '조선'은 문무역할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군사 전문성을 강조했다.
이 차이는 개인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정치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구조적 결과였다.
여기서 중요한 제도적 분기점이 있다.
너무 단순화하긴 했지만 바로 ‘무과제도 존재여부’이다.
고려에는 '무과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무관은 군공, 천거, 음서 등을 통해 임명되었고, 시험을 통해 공식 선발되는 구조는 아니었다. 무관 자체도 체계적으로 훈련된 전문직군이기보다는, 문신 보조자 내지 전투요원에 가까웠다.
반면 조선은 체계적인 무과제도를 운영했다.
기마술, 궁술, 병서 등 실기와 이론을 종합해 시험을 치렀고, 이를 통해 중앙과 지방의 무관이 선발되었다. '이순신장군'도 이런 무과를 어렵게 통과하여 무신이 되었다.
물론 조선 무과 급제자의 사회적 위상은 문과에 미치지 못했지만, 군사 전문성을 제도화한 구조는 무관의 독자적 권한을 인정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차이가 고려, 조선의 문무권력 구조를 결정짓는 핵심이 된 것이었다.
무과가 없는 고려는 문신이 곧 군사력까지 포괄했지만, 무과가 존재한 조선은 군사권력을 무관에게 분리 위임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문신이 전장에 나서기보다 장막 뒤에서 전략을 논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4.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단순히 우열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고려는 문무일체로 유능한 자가 책임도 졌지만, 권력집중 부작용 이 컸다.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문신에 의한 무신 홀대가 이어져 그 결과 고려 '무신정권'이 100년 가까이 계속된 원인이 되었다.
조선은 문무분리로 안정을 추구했지만, 대응력과 유연성은 떨어졌다. 그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강점기 까지 호되게 당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고려와 조선 문신들의 차이> 이 질문은 유효하다.
5. 오늘날에 던지는 질문
이 문제는 단지 과거 이야기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에도 ‘문무의 통합’과 ‘전문성의 분리’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가?
고려시대 무신정권처럼, 현대 군부독재 역시 결코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부독재는 약 30년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이는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2024년 12월 3일, ‘군사비상계엄’이 선포되는 현실을 직접 목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수립 이후 최근까지 <군사독재와 민주화>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험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는 군부의 책임과 권한, 그리고 전문성의 균형을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문무통합도, 완전한 분리도 아닌 ‘조정과 병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12·3 비상계엄 사태와 같이 ‘무’를 이용해 ‘문’까지 통제하려는 이 오도된 지도자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이로써 <고려거란전쟁'> 편을 마친다. 이어서 <고려의 대외 평화시대>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