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10 ㅡ 숨겨진 명장 '양규장군' 3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21
ㅡ 고려거란전쟁 10 ㅡ
(숨겨진 명장 '양규장군' 3)
'고려거란전쟁'은 종종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비교된다.
두 전쟁은 모두 초기에 국가존망 위협받을 정도의 패배를 겪었고, 왕이 수도를 떠나 피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조선 '선조'는 북쪽으로 몽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전세는 완전히 기울지 않았다. 각지에서 지휘관들이 등장하여 전황을 지탱하거나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의 경우에는 명이라는 거대 제국의 지원도 컸지만, 이순신을 비롯한 명장들과 의병장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이들은 역사 기록에 남아 널리 알려지며 오늘날까지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 고려의 장수들 또한 임진왜란 당시의 장수들에 못지않은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 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늘 이 글은 그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양규장군'의 활동과 숨겨진 명장들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거란황제 '성종'은 고려침공에서 수도개경을 직접 타격하는 전략을 세운다 다. 이른바 중간 방어선을 우회하고 핵심거점을 노리는 방식이었다.
그 첫 관문이 '흥화진'이었다.
당시 '흥화진'을 방어하던 장수가 바로 '양규장군'이었다. 그는 거란군 40만이 수일에 걸친 공격 견뎌내며 거란군 진격을 지연시켰다. 결국 거란군은 40만 병력을 20 만씩 분할하여 20만은 흥화진 인근에 남겨두고, 20만 주력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개경은 함락되고 궁궐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여기서 40만 병력, 20만 병력은 과장된 수치라는 견해가 현재 다수설이지만, '고려사' 등 역사 기록에 명확한 숫자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그대로 적용한다.
거란군은 '흥화진'과 '통주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하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전쟁 전개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거란군 40만 병력을 잘 막아낸 '흥화진'에
남아 있던 '양규'는 단순히 방어에 머물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의 영웅 '양규장군'이 '흥화진' 에서 나온 것이다.
양규는 말한다.
"우리가 거란 40만 대군을 잘 막아 냈다. 하지만 거란군은 우리를 피해 고려양민들을 인질로 잡고 남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 들 뒤를 쫓아 양민들을 구해낼 것이다. 나를 쫓아 같이 갈 사람들은 자원해라"
이렇게 해서 양규는 '700 결사대' 구성하여 흥화진을 나왔다.
이때부터 전설적인 <양규 700 결사대> 활약상이 고스란히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서경이 거란군의 맹공을 받고 있었던 1010년 12월, 양규는 흥화진에서 700명 결사대를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1,000명의 군사를 수습했다.]
ㅡ 고려사 양규열전 중에서 ㅡ
특히 흥화진 남쪽이 '물로대'에 주둔한 20만 명 거란대군에 의해 철저히 틀어박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양규는 소수정예 병력으로 은밀히 부대를 운영해 거란군 포위망을 뚫고 '통주'까지 남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부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거란군이 점령한 중간기지인 '곽주'로 진격하여 야밤에 6000명 거란 수비군을 몰살시키고 성을 탈환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떤 장군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어떤 장군은 결사대를 꾸려 성을 되찾고, 어떤 시대 어떤 시기 에도 명장과 졸장은 반드시 있다.
양규가 소수병력으로 '곽주성' 탈환했는데, 어떻게 공격했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성내 고려인들과 내응을 통해 무너뜨렸거나 뭔가 책략을 써서 성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야사나 TV드라마에서는 거란군 복장으로 변복하여 성을 지키는 거란군들을 속여 성에 들어간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순식간에 곽주성을 점령한 양규는 붙잡혀 있었던 고려 백성 7,000여 명을 구해 통주로 옮겨 통주성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이 곽주성 전투야 말로 고려거란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 승리 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군 손에 남아 있었다면 보급로를 확보한 거란군 공격에 서경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서경이 거란군에 넘어갔다면 거란군은 장기전도 가능해져 고려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역량자체를 상실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양규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그리고 이때 양규 옆에 또 한 명의 멋진 장군이 나타난다.
귀주별장 '김숙흥장군'이다.
양규와 김숙흥!
이 두 사람은 남자들 로망이라 할 만한 멋진 브로맨스를 보여주며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그리고 그 어떤 무협영화보다도 더 극적이고 비장미 넘치는 최후를 맞이한다.
양규와 김숙흥 휘하부대는 모두 전멸했지만 그 결사적인 맹공에 거란군 입은 타격이 너무나도 컸다.
거란군은 첫 전투에서 양규장군이 지키는 '흥화진'도 점령을 못 했다. 이후 어렵게 점령한 단 하나의 '곽주성'도 양규장군에게 다시 빼앗긴 것이 결정타였다. 그리고 양규와 김숙흥은 게릴라 전으로 거란군 후방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양규와 김숙흥 게릴라전 때문에 거란군은 배급로가 끊기고, 전진기지 마저 없이 싸우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철수하려는 거란군도 그대로 보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일은 구출한 고려 백성들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한 싸움이었다.
특히 철수하던 거란군이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양규 관할지였던 흥화진 수비대장 '정성'이 성을 박차고 나와 압록강 반쯤 건너던 거란군 후위를 기습했다. 이 공격으로 많은 거란군이 물에 빠져 익사했다. 이는 양규가 끝까지 흥화진을 굳건히 지켜낸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처럼 '고려거란 2차 전쟁' 시작과 끝에는 '양규장군'이 있었다
양규장군의 눈부신 전과로 고려는 막대한 노동력을 보전하고 배상을 면 하는 등 추가적 손실을 최소화했다. 또한 '3차여요 전쟁'에서
완벽한 복수에 성공할 수도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여기서 양규장군 전투능력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아보자.
양규은 현대 특수전을 연상시키듯 소수 특공대를 이끌고 인질구출· 게릴라전에 나섰으며, 이를 통해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양규는 흥화진을 사수하고 곽주를 탈환하는 등 수성전, 공성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양규는 다양한 특수전 전투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양규가 활약한 시기가 짧아 기록이 많지 않은 게 아쉽지만, 그 행적을 고려하면 한국 역사상 최고 명장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하다.
<조선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고려육지에는 '양규'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양규와 멋진 브로맨스를 보여준 '김숙흥장군'이다.
우리에게는 양규보다 덜 알려진 장군이지만, 양규는 김숙흥 부대와 힘을 합친 뒤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거란군을 상대로 한 달 동안 일곱 차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 또한 적군 수천 명을 사살하고, 동시에 고려인 포로 3만여 명을 구출한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고려사 기록 내용이다.
[귀주(龜州) 별장(別將) 김숙흥 (金叔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0,000여 급(級)을 베었다. 얼마 뒤에 거란(契丹) 임금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 오자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 (鴨綠江)을 건너 퇴각하였다. 정성(鄭成)이 그들을 추격하여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미에서 공격하니, 거란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심히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 [孤軍]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0,000여 구(口)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ㅡ 고려사 양규 열전 ㅡ
이처럼 <양규와 김숙흥>은 나라가 멸망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소수병력과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며 적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 기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백성까지 구하기 위해 자신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쳐 직분을 다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그들의 전사모습은 TV드라마에서도 나왔듯이 정말 비장미가 넘친다.
드라마적 극적인 최후가 아니다. 역사기록에 분명히 남아있다.
이런 양규와 김숙흥의 엄청난 전공의 결과는 당시 사람 노동력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 고려가 나중에 3차 침공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거란군에 잡혀 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병사로 복무하거나 전시에 필요한 군량미 등을 지원해 줄 수 있게 만들었다.
양규 김숙흥 이 두 장군 마지막 최후는 드라마에서 그 어떤 장면 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장미가 흐른다.
지나치게 과장한 게 아닐까 하지만 이 둘 죽음에 대해서 고려사에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양규와 김숙흥은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맞고 함께 전사하였다.]
ㅡ 고려사 권 94, 양규 열전 ㅡ
양규와 김숙흥이 게릴라 전술로 거란군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을 때, 한편 서경 평양성 역시 내부적인 혼란과 갈등 속에서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거란군은 끝내 평양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이에 거란군은 전략을 바꿔 서경 우회하고 곧바로 개경으로 진격한다.
개경으로 거란군이 몰려오자, 고려조정 대신들 다수는 항복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강감찬'이 등장한다.
'강감찬'은 항복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하며, 우선 수도를 비우고 남쪽으로 피난할 것을 건의했다. 이 의견에 현종이 동의하면서 왕은 몽진길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강감찬' 판단력과 결단력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강감찬은 지방관직을 전전하다가 60이 넘어서야 중앙에 진출한 인물로, 예부시랑(오늘날의 차관급)에 불과한 비교적 늦깎이 관료였다.
한편, 거란황제 '성종'은 수도 함락만을 목표로 중간방어선을 무시하는 ‘직도전략’을 감행했고, 이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고려성도 개경은 함락되고, 궁궐이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개경을 점령한 거란군은 이어 남쪽으로 추격군을 보내 고려 현종을 사로잡으려 했다.
현종 몽진길은 전라도 나주까지 이어지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특히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 현종을 인정하지 않는 지방세력도 많았고, 일부는 오히려 그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장면을 TV드라마에서도 잘 표현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현종을 호위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지채문'이다. 그는 전쟁 초기 서경방어에 참여하다가 후퇴 중 몽진 중인 현종 일행과 우연히 합류하게 되었고, 이후 나주까지 험난한 여정을 끝까지 함께한다.
또 다른 인물로 '하공진'이 있다. 그는 고려가 절체절명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거란군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스스로 거란 황제 사신으로 나아가 볼모가 되는 선택을 한다.
하공진의 이 결단은 결과적으로 고려가 시간을 벌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다음 편에서 전쟁혼란 속에서 현종 몽진을 호위한 인물들, <지채문과 하공진> 행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