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7 ㅡ 거란 2차 침략 1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18
ㅡ 고려거란전쟁 7 ㅡ
(거란 2차 침략 1)
'목종'의 친위 쿠데타 시도는 결국 '강조의 정변'을 불러왔다.
1009년, 고려 중앙군 수장이자 군사적 실력자였던 '강조'는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 옹립하며 역사상 유례없는 무력정변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강조의 절정은 곧 몰락의 시작이기도 했다.
고려 내정은 물론 외교 질서마저 뒤흔든 '강조의 정변'은 결국 거란 2차 침략과 함께 비극적 국면으로 이어지게 된다.
거란 1차 침략 이후 고려는 '서희의 외교담판'을 통해 송나라와 공식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요나라(거란)와 조공 관계를 약속했다. 그 대가로 고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고려는 여전히 송과 문화적·외교적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고, 거란과 관계는 미묘한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강조의 정변'은 거란에게 고려를 다시 침략할 수 있는 중요한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거란은 목종과 비교적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무장이 군사를 동원해 국왕을 폐위한 사건을 조공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이러한 정변이 거란 내부정치 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강조의 정변은 거란이 고려를 다시 침략하기 위한 좋은 명분이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저 거란이 울고 싶을 때 뺨을 때린 꼴이 되었다.
거란이 고려를 다시 침략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 고려가 송과 여전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 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해 빼앗긴 강동 6주 반환문제,
-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강화하려는 전략적 목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거란은 고려에 대한 영향력 약화를 우려하면서, 군사 행동을 통해 고려를 다시 종속적 관계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1010년, 거란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려를 재침략했다. 이번 원정은 요나라 황제인 요 '성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설 정도로 대대적인 군사행동이었다.
정통사서에는 거란 병력이 40만 대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규모는 그보다 훨씬 적은 약 10만 명 정도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오늘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위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고려의 '현종'은 이러한 거대한 침략 앞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때 정변 주역이자 군사적 실세였던 강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을 막겠다고 나섰다.
기록에 강조는 약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쪽의 개마곡 일대로 진군하여 거란군과 맞섰다고 나온다. 다만 이 20만 수치 또한 과장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고려 병력은 약 1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침략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온 거란군 공격에 맞서 임시로 편성된 강조의 고려군은 결국 큰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른바 '통주 전투'였다.
'통주전투'에서 '강조'는 거란기병 돌격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고려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거란기병에 전열이 무너져 큰 패배를 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포로가 된 강조는 거란 회유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장수로서 자존심 지키며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또한 패배 이후 목종 혼령을 떠올리며 사죄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는 그 역시 목종 시해에 대한 죄책감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 일지도 모른다.
통주전투 패전은 초기 고려가 거란침입에 취약했음을 보여주며, 이후 방어체계와 요새화전략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조 '통주전투'는 단순한 패배가 아닌, 고려 방어전략 변화 분기점으로 기록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황제를 폐위시킬 정도 힘을 가졌던 무장이 외세의 침입 앞에서는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점이다.
강조는 황제를 갈아치울 수는 있었지만, 국경을 지킬 힘까지 갖추지는 못했다.
즉 강조는 정권을 장악했지만 체제안정과 외교적 균형, 귀족세력 통합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과론적으로 봐서는 거란이라는 강력한 외세세력 존재하는 상황에 무력으로 황제를 교체한 것은 외교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의 행보를 단순히 무모하고 비겁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강조는 최고권력자 위치에 있으면서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거란군과 싸우기 위해 전장에 나섰다.
정변 직후였기 때문에 대군을 다른 장수에게 맡기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고, 왕을 폐위한 자신의 정치적 부담을 전공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강조의 몰락 이후 고려 조정은 사실상 큰 혼란에 빠졌다.
거란군이 개경 근처까지 침입해 오자 조정대신들 사이에서는 항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때 대부분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반대 의견을 낸 인물이 바로 '강감찬'이었다.
당시 강감찬은 아직 높은 권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무관도 아나 문신으로서 직책도 낮았다.
나이 역시 이미 60이 넘은 상태였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묘사되듯이 당시 조정대신들 가운데서는 이런 강감찬을 고집스러운 노신 정도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감찬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강감찬이 무조건 싸우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상황을 비교적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북방에서 '양규'가 '흥화진 성'을 지키며 거란군 보급로를 끊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조금만 더 끌면 전세를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강감찬 판단은 상당 부분 현실과 맞아떨어졌다.
이 장면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약 600년 뒤 '조선'에서 벌어진 '병자호란'이 떠오른다.
흥미로운 점은 두 시기 침략군이었던 '거란'과 '여진'의 상황은 유사했지만, 이를 대하는 '고려'와 '조선'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는 점이다.
'고려거란전쟁' 당시에 고려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항복을 주장했고, 강감찬 같은 소수 인물만 '주전론'을 펼쳤다.
반대로 병자호란 때 조선조정에서는 상당수 관료들이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론'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상헌'이었다.
반면 현실적인 협상을 주장한 '주화론자'는 최명길 등 소수에 불과했다.
이처럼 한반도 역사에서는 외세 침략 앞에서 항상 비슷한 고민이 반복되어 왔다.
"싸울 것인가, 아니면 협상할 것인가."
'주전론'과 '주화론' 어느 선택이 항상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전쟁에서 싸울 것인지, 협상할 것인지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군사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는 우리 역사 속 외세 침략에 대응했던 방식을 간략히 살펴보고 싶지만, 내용이 너무 방대하므로 별도 다음 편 글에서 따로 한 편으로 정리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거란 2차 침략' 당시 고려는 큰 위기 속에서도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대응하고 있었다.
'양규'는 북방에서 거란군을 견제하며 시간을 벌었고, '강감찬'은 조정에서 끝까지 신중한 판단을 주장했다.
'현종' 역시 수도가 파괴되는 상황 속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며 황권의 정통성 유지했고 이후 외교협상과 군사체제 정비를 통해 국가를 다시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우리 역사 속에 숨어있는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강조의 정변은 거란 2차 침략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 사건이 남긴 충격은 이후 고려정치 구조 에도 영향을 주었다.
왕권중심체제를 다시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강조의 몰락은 군사력에 의존한 정치가 얼마나 불안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고려 시대 거란 1차 침략 당시 '서희의 외교 담판'을 들고 싶다.
전쟁을 하지 않고 외교로 전쟁을 막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안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충분한 힘 또한 함께 갖추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서희지혜'를 되새기며 한반도에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어서 <고려거란전쟁, 숨어 있었던 장수들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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