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9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909
ㅡ 우주 앞에 선 인간,
우리가 끝내 회피해 온 질문들 ㅡ
중국영화 '유랑지구'를 보았다. 완성도나 연출에는 분명 아쉬움이 남지만, ‘지구를 이동시킨다’는 설정 하나만큼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이 다소 과장된 상상은 오히려 우리가 오랫동안 외면해 온 질문을 정면으로 끌어낸다.
<우리는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가?>
영화 속 인류는 태양의 종말을 피하기 위해 지구 자체를 하나의 우주선으로 만든다. 그리고 수천 년에 걸친 항해를 시작한다.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생존, 인간의 감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거리.
물론 이 설정은 현재 과학으로 실현불가능 하다. 그러나 이야기 가치는 기술적 가능성에 있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완전히 잃어버린 ‘우주의 거리감’을 복원한다는 점에 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인 '프록시마 센터우리'조차 약 4.3광년 떨어져 있다. 이는 빛의 속도로도 4년 이상 걸리는 거리다.
우리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 '프록시마 센터우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인류문명 전체를 수백 번 다시 시작해도 모자랄 정도다.
이 수치는 단순한 계산을 넘어선다. 사실상 ‘닿을 수 없는 거리’에 가깝다.
우리는 우주를 이해한다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 규모를 전혀 실감하지는 못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시선이 떠오른다.
그는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카메라를 돌려 지구를 촬영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른바 ‘창백한 푸른 점’이다.
그 작은 점 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역사와 문명, 사랑과 증오, 전쟁과 화해. 인간이 중요하다고 믿어온 거의 모든 사건은 그 점 하나 위에서 벌어진 일이다.
우주는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지구만이 유일한 생명의 터전인가?>
현대 천문학은 이에 대해 단정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우리 은하에는 수천억 개의 별이 존재하고, 우주에는 그러한 은하가 다시 수천억 개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별들이 행성을 또 행성은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
이 조건들을 바탕으로 지적생명체 존재 가능성을 추정하는 공식이 '드레이크 방정식'이다.
드레이크 방정식 공식은 아래와 같다.
N = R* × fp × ne × fl × fi × fc × L
R*: 별 생성률 (연간 몇 개의 별이 만들어지는가)
fp: 행성을 가진 별의 비율
ne: 생명 가능 행성 수
fl: 생명이 실제로 생길 확률
fi: 지적 생명으로 진화할 확률
fc: 교신 가능한 기술 문명 비율
L: 그런 문명이 지속되는 시간
이 방정식 결과는 하나의 결론을 가리킨다.
“지구만이 유일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우리 은하계에만 100개 정도 지적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그 어떤 외계문명과도 만나지 못했다.
이 침묵은 영화 '콘택트'가 던졌던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가능성은 충분한데 왜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문명의 자멸, 기술적 한계,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의 차이> 그러나 그 모든 설명 위에 놓인 하나의 명확한 조건이 있다.
<거리다.>
빛의 속도로도 수년에서 수십억 년이 걸리는 공간. 우리가 바라보는 별빛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이며, 어떤 빛은 수십억 년 전에 출발해 이제야 도달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이 어긋난 우주에서 서로 다른 문명이 ‘동시에 존재하고, 서로를 인식하며, 실제로 만난다’는 일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확률의 문제다. 그리고 그 확률은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극단적으로 낮다.
결국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여기서 우리 인류는 두 가지 태도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허무'다.
우리는 너무 작고, 우주는 너무 광대하다.
다른 하나는 '책임'이다.
지구를 지속가능한 행성으로 계속 유지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의 그 작음이 오히려 선택을 요구한다.
우주는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미는 언제나 인간이 만든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의미를 선택하느냐다.
허무냐? 책임이냐?
지금 인류는 기술적으로는 행성 규모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도 그 수준에 도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단기적 이익을 위해 장기적 기반을 훼손하고, 이해보다는 갈등을 선택하며, 공존보다는 경쟁을 우선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표면 곳곳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바라보면, 인류가 이 ‘창백한 푸른 점’을 보호하려는 ‘지속가능한 존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 종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소모하다 사라질 종인가?
이 질문은 감상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과연, 누가 이 선택 앞에서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을까?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여전히 수많은 별들이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이 거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 한 번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숨 쉬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은 '위안'이 아니라 '책임'에 가깝다는 것을...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