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와 정도전 2 - 고려는 '요동성'을 점령 한 바 있다!)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90
ㅡ 조선건국의 서막 3 ㅡ
(이성계와 정도전 2 - 고려는 '요동성'을 점령 한 바 있다!)
'위화도회군'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 이 있다.
고려는 이미 위화도회군 이전에 '요동성'을 점령한 전적이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이성계장군'이 직접 참여한 '요동정벌'은 미수에 그친 계획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 에 옮겨졌고, 고려군은 요동성을 점령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런데도 이 역사적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조선건국 후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성계가 다시 요동정벌에 나서 '사불가론' 주장하며 위화도회군을 단행했고, 이어 조선건국 직후,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추진하려 했으나 반발이 거세졌고,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계획이 무산 되었다. 조선왕조는 명에 사대입장에 있었기에 조선건국 후 편찬한 '고려사'에서 이런 사실이 의도적으로 축소·배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고려의 요동성 점령 사실이 역사적으로 크게 다뤄지지 않는 이유는 나 역시 의문이다.
요동(遼東)!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멸망한 뒤 삼국이 통일되었지만, 한민족은 한반도 안으로 갇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요동'은 고구려 기상과 함께 우리민족 ‘꿈의 땅’이 되었고, 오랫동안 되찾고자 하는 이상향으로 남았다.
요동의 범위는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일반적으로는 만주벌판 동쪽 지역을 가리키며, 현재 중국 행정구역으로는 랴오닝성(辽宁省)동부, 특히 단둥(丹东) ·잉커우 (营口)·다롄(大连) 일대를 포함 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강하게 추진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언젠가 대한민국이 요동지역을 역사적 근거를 들어 자국영토라고 주장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일 것 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보면, 요동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비롯해 우리 민족의 본거지였다.
신라 삼국통일 이후, 그리고 발해멸망 이후 1,000년 넘게 우리는 요동을 잃고 ‘남의 땅’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요동은 우리 한민족이 숨결을 나누고 피와 땀을 흘리며 거의 4천 년 동안 부대껴 온, 역사 속에 뿌리 깊은 한민족 땅이었다.
우리가 거의 기억하지도 못 하는 요동정벌 속으로 들어 가 보자!
1357년, 공민왕 6년에 공민왕은 장군 '인당' 에게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다. 고구려 부흥세력 '고연무'와 신라 '설오유' 연합작전 이후 최초로 압록강을 건너 원정을 직접 실행하게 했다.
그 당시 '원'은 요동 주요도로마다 역참을 설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파사부' 였다. 파사부는 지금의 랴오닝성 단둥시 일대로 압록강 하구로서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통로이다. 고구려 미천왕 때 점령한 '서안평'이 바로 이곳이다.
그 후에 고구려에서는 '구련성' 이라 불리었다.
'러일전쟁' 당시에도 만주진출을 노리던 양국이 충돌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만주진출시 가장 먼저 점령해야 될 요충지였다.
그래서 이 정벌은 '파사부정벌' 이라고도 부른다.
이 후 공민왕은 조금 소강상태를 보낸다.
그 뒤 명 건국 직후인 1368년,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는 공민왕 본심이 아니었다.
당시 요동은 명나라와 원나라 모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명나라는 내부 친원세력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빴고, 원나라는 더 이상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영, 이성계, 이인임 등 고려의 정치적 주역들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면 안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370년 1월 겨울, 고려군은 파사부에 이어 요동성으로 가는 주요 요충지인 고구려 첫 수도,
'졸본성'이 있었던 '오녀산성' 을 공략하러 나선다.
당시 고려군이 오녀산성으로 진군을 시작한 것은 공민왕에게 살해당한 '기철'(기황후 오빠) 아들 '기사인테무르'가 아버지 원수를 갚고자 서경에서 요동으로 이전된(1280년) '동녕총관부'를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켜 고려 북쪽을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이들 공격을 막아낸 후,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본거지 '오녀산성'을 정벌하러 출병한 것이다.
이때 동원된 고려군 병력은 중앙군도 포함된 총 1만 5천명 이었다. '조선실록'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 친위병력 16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는 이성계가 직접 지휘하는 15,000명 고려군은 동북면 → 함흥 → 강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오녀산성을 쳤다.
훗날 조선세종 때 한글로 만든 '용비어천가'에 이성계가 오녀산성을 정벌할 때 활약한 모습이 담겨 있다. 천혜 요새 오녀산성을 공략할 때 이성계가 신궁솜씨로 빛을 발한 내용이다.
이에 기철 아들 '기사인테무르' 는 오녀산성을 탈출하여 고려출신 벼슬아치 '김바얀'과 손을 잡고 요동일대 남아있던 원나라 유민들 끌어 모아 '요동성'에 들어가 은거 한다.
1370년,10월 공민왕은 요동성에 남아 있던 기사인테무르를 잡아 족치기 위해서 원정군 총 책임자 도통사시중 '이인임'을 필두로 야전군총사령관인 서북면도원수 '지용수', 서북면부원수 '양바얀', 동북면원수 '이성계', 안주상만호 '임견미'를 임명하여 그 군대를 요동성으로 향하게 했다.
상당한 고생 끝에 고려군은 요동성에 도달한다. 요동성에서 반나절 간 치열한 접전 끝에 1370년 11월 4일, 발해가
멸망 한 지 256년만에 고려는 '요동성점령' 에 성공한다.
고려군은 요동성을 점령은 했지만 '기사인테무르'는 이미 요동성을 탈출하여 잡진 못했다. 그의 측근인 '김바얀'을 사로 잡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 후 공민왕은 동녕총관부에
"우리가 요동을 친 건 '기사인 테무르'가 감히 원나라 황제 이름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 대신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요동은 원래 우리 땅이었으니 따지지 말라"
라는 내용을 요지로 한 공문을 보냈다.
그 후 다음 달인 12월에 강계만호부에 지시해서 요동에 살고있는 주민들이 고려로 귀화할 시 요동에다 땅을 주고 고려백성 과 똑같이 대하도록 했다.
그 후 공민왕은 요동에 있는 잔존 원나라 세력을 물리치면서 동시에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고려인도 고려국 세력으로 받아 들였다.
이처럼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땅 이었던 요동성을 발해 멸망한지 256년만에 드디어 우리민족 영토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동성전투'서 고려군은 가장 결정적인 실책을 하고 만다. 요동성을 점령하던 전투를 벌이다 실수로 성 내 군량고에 불이 붙어 군량이 죄다 타버렸다는 점이다. 고려군이 가져온 식량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고려 본국에서도 보급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또 당시는 겨울이라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수도 없었다.
고려군은 요동성을 어렵게 점령해 놓고도 식량부족으로 별다른 조치 없이 곧 장 철수하고 만다.
사실 당시 고려군은 요동성까지 점령한 이유가 그 지역 영토를 차지하고 고구려 영토를 복구 한다는 원대한 꿈보다는 단지 기철 아들 기사인테무르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뒤쫒아 간 것 뿐 이었다.
기사인테무르를 잡지는 못 했지만 그를 거의 빈 손으로 도망가 재기 못하게 했으니 고려군 목적은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고려군은 요동성에 별 미련 두지 않고 철수를 결정했던 것이다.
고려군이 요동성을 점령했을 때, 만약 조금 더 멀리 내다보고 치밀한 전략을 세워 요동성과 요동 땅을 끝까지 지켜냈다면, 오늘날 만주는 우리 땅이 되었을까?
그랬다면 2차, 3차 요동정벌
시도는 물론, ‘위화도 회군’이나 ‘제1차 왕자의 난’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 편인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편에서 본격 다루겠지만,
<그 당시 위화도회군 없이 요동정벌을 끝까지 실행했다면 성공했을까? 그리고 요동 땅은 지금 우리 땅이 되었을까?>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만 한 고민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조선 대학자 '정약용'도 역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고, 그 생각을 글로 남겼다.
그 전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아마 요동 땅을 두고 한민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시각일지도 모른다.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제12권 「요동론」
(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第十二卷 ‘遙東論’)
[고구려 때는 국토를 멀리 개척하여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와 접했고, 남쪽으로는 개모(蓋牟)(지금의 산해관 동쪽)까지 이르렀다.
고려 이후 북부와 남부는 모두 거란의 차지가 되었고, 금과 원을 거치면서 다시는 되찾지 못했으며, 압록강 일대가 천연의 경계가 되었다.
세종·세조 시대에 이르러 마천(摩天) 이북으로 천 리 땅을 개척하고 육진을 설치했으며, 바깥으로는 창해에 닿았으나 요동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이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요동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 나라에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본다. 요동은 중국과 북방 민족이 왕래하는 요충지로, 그곳을 차지하면 사방에서 전쟁과 부담이 끊이지 않아 나라의 힘이 고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하 원문 내용 유지)…
다만, 만일 나라가 강성하여 천하를 다툴 뜻이 있고, 중원을 넘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요동을 먼저 얻어야 한다. 요동을 확보하고 여진을 평정하며, 북으로 흑룡강 근원까지, 서쪽으로는 몽골과 맞선다면 큰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의 글을 읽고 나면 조금 혼란스럽다.
요동을 차지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차지하지 말자는 것인지 애매하다.
아마도 정약용 의도는 요동은 "현실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땅이지만, 이상과 꿈은 잃지 말자”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고려와 조선에게 요동은 ‘계륵’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정말 위화도회군이 없었다면, 오늘날 요동은 우리 땅이 되었을까?
이 이야기는 다음 편 ‘위화도회군’ 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이어서 이성계와 정도전 3,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