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93 마지막 편

이성계와 정도전 5 -이방원과 정몽주 죽음

by 초롱초롱 박철홍

<고려 마지막 편>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93


ㅡ 조선건국의 서막 6ㅡ

(이성계와 정도전 5 -이방원과 정몽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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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써 고려 편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역사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초롱초롱 박철홍의 조선 오백년도 흐른다 >였습니다.


당시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으로서 출판기념회용으로 급히 엉성하게 책으로 엮었던 것이 출발점 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역사 글쓰기를 이어오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를 지나 상고사· 고대사· 발해ㆍ후삼국· 고려사>에 이르기까지 한 호흡 으로 달려왔습니다.


오늘 이 글을 끝으로, 제 나름 <한국통사 전편>이 완결된 셈 입니다.


돌아보니 저 스스로도 놀랍고, 동시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언젠가는 이 글들을 엮어 <5~6권 분량의 한국통사 전집>으로 내고 싶습니다.


전문 역사학자 연구서 수준은 아니지만, 일반 수준을 조금 넘어서는 깊이와 동시에 대하 역사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사실 요즘엔 제가 쓴 글들을 아침 식사하면서 한 편씩 다시 읽고 있는데, 참 재미있고 진짜 쑥쑥 읽힙니다. (ㅎㅎ 제가 할 말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요.)


이제부터는 브런치북에도 싣기 위해, 처음 썼던 조선건국 이야기 부터 다시 정리하고 다듬어 보려 합니다.


브런치 북에서는 우주역사부터 시작하여 상고사 편이 지금 연재되고 있습니다.


자주 방문하여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언젠가 제 역사 글들이 <한국통사 전집>으로 발간되어, 집집마다 두고두고 꺼내 읽는 책이 되기를…


조금 허황된 꿈을 조심스레 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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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 ㅡ


‘포은 정몽주’라 하면 누구나 먼저 떠올리는 시조가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길이 있으랴]


바로 ‘단심가’라 불리는 작품이다.


우리 중고 시절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지금도 많은 이들이 외우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십 대 시절 첫사랑의 지고지순한 마음을 표현할 때도 차용할 수 있을 만큼, 애절하면서도 웅장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과연 이 시조가 정몽주가 실제로 읊은 것일까?


오늘 날 역사학계 정설은 정몽주 가 이방원과 대작하며 지은 작품 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 유명한 시조가 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서로 엉킨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엉켜 백 년을 누리리라]


이른바 ‘하여가’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 읊었다가, 끝내 자기 심복 '조영규' 로 하여금 정몽주를 살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이방원 나이는 스물다섯, 정몽주는 쉰일곱 이었다. 나이 차가 서른 살이 넘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런 시조를 주고받았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의문스럽다.


더구나 이 시조들 역시 '고려사'와 같은 정사에는 보이지 않고, 훗날 나온 '청구영언'이나 '포은집'에만 실려 있어 사후에 꾸며진 문학적 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야사에는 정몽주가 죽음을 예감하고 선죽교에 이르기 전 주막에서 말을 거꾸로 타고 나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주막주인이 그 이유를 묻자

“죽음을 앞두고 그들에게 놀라는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정몽주 말은 애수 어린 비장미를 더한다. 그러나 이런 전승 역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세의 덧칠일 가능성이 크다.


'위화도회군' 직후까지만 해도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은 동지 였다. 그들은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웠으며, 곧 창왕을 <신돈의 씨>라 주장하며 폐위 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기까지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존속 시키고 유교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온건파 였다.


정도전은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혁명파였다.


공양왕 즉위 이후 두 사람은 점차 갈라섰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존경은 남아 있었다.


정몽주는 후배인 정도전에게 '맹자'란 책을 선물하며 학문을 권했고, 정도전도 정몽주를 선배로 깍듯이 대우했다.


그러나 정치적 현실은 냉혹했다.


이성계 명망을 업은 신진사대부 들은 점점 더 왕조 교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정몽주는 점차 소외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성계'가 사냥 도중 낙마하여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몽주는 이것을 천재일우의 기회라 여겼다.


그는 대간에 “이성계가 위독하니 먼저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 이어 이성계마저 없애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 탄핵당해 귀양 가고 목숨까지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이때 '이방원'이 움직였다. 그는 부상당한 아버지 이성계를 개경으로 호송하며, 장수들에게 외쳤다.


“이씨가 왕실에 충성한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바다. 그런데 정몽주가 모함으로 악명을 씌우니 후세에 누가 이를 분별하겠는가?”


결국 정몽주 제거가 결정되었다.


이성계가 이에 동조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다. 사서에는 이성계가 크게 분노하며 정몽주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방원 에게 책임을 돌려 스스로는 "쿠데타 동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명분을 챙겼다는 해석도 있다.


정몽주 죽음 결정적 장면은 '변중량'이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이려 한다”고 귀띔했지만, 정몽주는 직접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속내를 확인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예전과 전혀 다름없이 친절하게 대하며 속마음 을 감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방원이 정몽주의 뜻을 떠보려 ‘하여가’를 읊었고, 정몽주가 ‘단심가’로 화답했다는 전승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문학적 각색에 가깝다. 실제로는 그럴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그 이유는 앞 서 말했다.


결국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 심복 '조영규' 등에게 습격당해 생을 마감했다.


이성계는 겉으로는 진노했으나 내심은 달랐을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정몽주 세력은 역적 으로 몰려 제거되었고, 귀양 갔던 정도전 등은 풀려나 권력 중심 으로 복귀했다.


정몽주 죽음은 겉으로는 이방원의 독단이었으나, 그 배후에 이성계 와 정도전 계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권력 앞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다.


정몽주 세력이 제거 되자 정도전 등은 거칠 것 없이 이성계를 왕위 에 나갈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 해 1392년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다.


드디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것이었다.


당연히 건국에 공이 큰 공신들을 발표 한다.


그런데 그 일등 공신에서 이방원 은 제외된다.


조선은 건국되자마자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되고 있었다.


이어서 <조선건국과 '정도전' 1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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