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상고사도 흐른다. 5

(고조선 역사와 멸망)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상고사도 흐른다. 5

ㅡ '단군신화'와 고조선시대 (3)ㅡ

(고조선 역사와 멸망)


이제 신화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역사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고조선의 역사는 약 3천 년 가까이 이어졌다고 전해지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나 유물이 거의 없어서 한, 두 편 정도로만 정리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학계에서 고조선은 보통 <단군조선–위만조선> 2시기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3시기로 구분된다.


여기서 큰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商)나라 왕족인 '기자'(箕子)가 '은'나라 멸망 후 기원전 1122년경 5천여 무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왕이 되었다는 설에서 비롯된다.


'한서지리지'에는 기자는 은나라 충신으로 조선에 망명해 백성을 교화했으며, '주'(周)나라가 그를 조선 제후에 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남북한 모두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기자조선이 중화사상과 동북공정 연장선에서, 고조선마저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의도가 담긴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기자조선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단군조선' 속에 포함시켰으며, 이승휴 '제왕운기' 에서도 ‘후조선’이라 하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조선사대부들은 중국 '성현'이 조선에 와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국가적 차원에서 '기자릉' 제사를 지냈다. '세종' 또한 기자조선 유교 전통을 본받아 조선 통치이념을 세우려 했다.


현대 민족사학자들은 기자조선을 ‘기자’의 전래가 아닌, 토착 '한'(韓)씨 세력의 나라로 본다.


'후한' 왕부의 '잠부론'에는 연나라 인근에 ‘한후'(韓侯)가 있었고, 이 세력이 위만에게 패망해 바다를 건너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준왕'(準王) 성씨가 ‘한씨'(韓氏)였음을 추정한다. 즉 '기자'는 외래인이 아니라 고조선 토착세력이었다는 해석이다.


<위만조선>은 기원전 194년부터 108년까지 약 86년간 존속한 고대국가이다.


'사기'와 '한서'에 따르면, '위만'은 '연'나라 출신으로,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고조선'에 들어와 '준왕'을 몰아내고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


그는 조선어와 한어(漢語)에 능통했고, 진번·임둔·옥저 등 주변을 복속해 영토를 확장한 유능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었다(魋結蠻夷服)”는 기록이 있어 본래 '고조선계'였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그는 기존 고조선 제도와 국호를 그대로 유지했고, 현지 세력을 중용했다. 이는 단순한 외래 정복자라기보다는 고조선 내부 세력과 유이민 집단 결합 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 개념이 희박했다. 따라서 위만이 중국계인지 조선계인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등장함으로써 조선이 한나라의 세력권과 직접 맞닿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대에 이르러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한 무제' 공격(기원전 109~108년)과 내부 분열로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고조선 3000년 가까운 역사가 이 정도로 정리된다.


고조선 자체 기록은 전혀없고, 중국 사서 중 단편적인 기록에만 메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어쩔 수없는 일이다.


3000년이면 엄청난 긴 세월인데 왕이름 조차도 <기자, 위만, 준왕, 우거왕> 정도민 남아있다.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에 멸망한 후, 고조선 유민들은 남북으로 흩어졌다.


북쪽으로 간 세력은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고, 남쪽으로 내려온 세력은 한강유역에 '진국'을 세운 뒤 마한· 진한· 변한 으로 갈라졌다. 이를 합쳐 ‘삼한’ 이라 부른다.


조선후기 ‘삼한정통론’은 바로 이 계승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사대부들은 위만을 찬탈자로 보고 적통은 준왕이 이은 '마한'에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반면 현대민족사학은 '기자' 자체가 토착세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두 관점은 서로 엇갈리지만,

최근 마한세력과 한씨조선사이 고고학적 연속성이 확인되면서, '삼한정통론'에 일정부분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당시 '삼한정통론'은 현대적 실증사관 아닌 조선시대 관념론적 사관 이었다.


이제는 중국 적통운운에서 의미 찾는 이들은 더 이상 없지만, 마한 일대가 위만 이전 조선과 강력한 연계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일부 연구자들은 식민사관 극복을 내세우며 마한을 중국이나 고구려와 연결하기도 하는데, 이는 ‘환단고기’류 주장과 맞닿아 있어 정통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고조선사'는 기록 부족 탓에 다양한 이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자든 위만 이든 단순히 중국인 출신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고조선이 동북아 역사 속에서 차지한 위치와 역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는 신화적 '환웅'에서 비롯되었으나, 실제 역사적 무대 위에서는 고조선을 거쳐 삼국으로 이어졌다.


다음 글에서는 고조선 이후, 삼국시대 이전의 시기를 이어가겠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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