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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환 May 17. 2020

공증 에피소드

공증 에피소드

협동조합 교육을 갈 때면 우스갯소리로 공증 에피소드를 말한다.

이른 아침 띵딩 띵딩딩, 띵딩 띵딩딩. 스마트폰 홈커밍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낯익은 전화번호. 왠지 예감이 좋다. 얼마 전 협동조합 설립신고를 위해 방문했던 구청 담당자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 설립신고확인서가 나와 전화드렸어요. 시간 되실 때 찾아가세요. 전화를 내려놓기 무섭게 모든 일을 제쳐두고 구청으로 향했다. 담당자는 가족협동조합이 처음 이라며 잘되길 바란다는 응원과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웃음이 나왔다. 종이 한 장이 뭐라도 되는 양 여태껏 왜 이리 애타게 기다렸는지.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농부가 마른땅에 씨를 뿌리고 과실을 맺은 것처럼.      


온 김에 들를 곳이 있었다. 창립총회 의사록 공증을 위해서다.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자 희끗희끗한 머릿결에 연세 지긋한 변호사와 직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준비한 공증서류를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이윽고 머뭇머뭇 물었다. 혹시 의사록에 이름을 적은 이 분은 누구시죠? 글씨가 조금 이상해서요. 이상히 여길만 했다. 지적한 것은 여섯 살 현준이의 서명이었다. 자기 이름 석 자 말고는 글을 쓸 줄 모르는데 삐뚤빼뚤 술에 취한 듯 이름을 적어 놓았으니 누가 봐도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며칠 전 의사록 서명을 위해 가족이 둘러앉았다. 얘들아! 가족협동조합을 만들 건데, 너희들도 조합원이 되려면 서류에 이름을 적어야 하거든. 그러자 대뜸 아빠 그럼 뭐 사줄 건데요? 나 참, 사주긴 뭘 사주냐! 그냥 이름만 적으면 되지! 이름 쓸 거니까 저는 치킨 사주세요. 첫 째 아들이 선수를 쳤다. 이때를 놓칠 리 없는 둘째 아들. 아빠 저는요, 곰돌이 젤리 사 주세요. 어리다 얕보면 큰 코 다친다 했던가. 재빠른 상황 판단과 명확한 협상 조건을 내걸었다. 예상치 않은 요구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고수였다. 상황이 궁하니 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당했다.     


이렇게 이름 석 자를 얻는데 치킨 한 마리와 곰돌이 젤리 두 봉지가 들었다. 어렵사리 이름을 적고, 인감도장을 찍으려는 순간, 도장이 춤을 췄다. 정해진 자리에 도장을 찍으려는 아빠에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들. 손에 쥔 도장을 이리저리 돌리며 장난치기를 몇 번이던가. 그날 도장 하나를 얻기 위해 마음속으로 참을 인 백 개는 새겼을 것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받은 서류임을 알 리 없는 변호사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증을 해드리기 어렵겠습니다. 미성년자 아이에 의사를 법률행위로 인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순간 드라마 주인공처럼 마음속으로 중얼중얼거렸다. 변호사님 제가 아이의 부모로서 법정대리인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법률행위 의사를 대리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안녕히 계세요. 따지면 무엇하랴. 우리에 인연이 여기까진 걸.


다른 공증 사무실을 찾았다. 담당자는 군말 없이 미성년 아이에 법정대리인 동의서를 꺼내 들었다. 작성법을 알려주더니, 이내 공증은 완료됐다. 문득 드라마 속 주인공의 대사가 떠올랐다.“모르는 것보다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야”

공증을 통해 깨달았다. 전문가 모두가 진정한 전문가는 아니라는 것을. 또 하나 협상의 고수인 아이들에 마음을 얻으려면 참을 인 백 개를 새길만큼 인내와 긴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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