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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환 May 15. 2020

초식동물로 살아가는 법

초식동물ㄴ 살아가는 법

나는 초식동물이다. 한 끼 식사가 아닌 한 번의 삶을 걸고 뛰는 초식동물 세계에 존재한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은 오늘도 쫓고 쫓기는 생존경쟁이 벌어진다.‘누구는 맹수로 태어나 평생 쫓으며 살고, 누구는 초식동물로 태어나 평생 쫓기며 살아야 하는 불공평한 세상. 하지만 자연은 공평하다. 사자와 표범, 치타 같은 맹수들은 500미터 이상을 전력질주할 수 없다. 급격한 체온 상승은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 어떻게든 500미터 안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맹수는 한 끼 식사를 위해 달리고, 가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달리는 약육강식의 세상. 세렝게티의 생태계다.           


태어나 살아 있는 동물을 본 것이 기껏해야 개와 고양이, 참새와 제비처럼 일상에서 마주하는 생명체 정도였을까. 어린 시절 TV 속 동물의 왕국은 신비로웠다. 목주름을 방패처럼 활짝 펼치고 쏜살같이 뜀박질하는 목도리도마뱀. 물속을 넘나들며 솟구치는 돌고래 무리는 빙글빙글 돌다 텀벙 물을 튕기며 바다와 하나가 됐다. 동물의 왕국은 괴상하고 기이한 동물들로 가득했다. 문득 풀을 먹는 초식동물과 그들을 목숨 삼는 육식동물은 무엇이 다를지. 궁금함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호랑이와 사자는 독립생활을 하거나 작은 무리를 이룬다. 생존의 이익이 아니면 뭉치지 않는다. 오직 초식동물의 희생만이 그들의 생존법칙이다. 육지에서 가장 큰 코끼리는 무리를 지어 서로를 감싼다. 희생이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코끼리 가족의 울타리는 평화로웠다. 그때 알았다. 내 몸속에 심어진 동물적 유전자(DNA)가 초식동물이라는 것을.           


10년 전 일이다. 연신내역을 지나 조금 걸으면 2층 모퉁이에 작은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전 그곳에서 공인중개사의 삶에 흔적을 새겼다. 10개월 간 한 건의 상가중개도 성사하지 못했다.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마음을 심으면 뿌리를 내리고 결실도 맺힐 것이라던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 시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여느 때처럼 동료 중개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사방에 침을 튀겨가며 크고 작은 말풍선을 만들어댔다. 상황은 이랬다. 며칠 전 중개했던 1층 곱창 집 가게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네 사장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염려 놓으세요!

전화를 내려놓자 중개사는 이제 됐다 싶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개사님 얼마에 중개하셨어요.     

곱창집 사장님은 권리금 1억을 생각하셨는데, 들어오는 분이 권리금 5천 이하가 아니면 생각이 없다고 해서 중개하느라 애 먹었습니다.

곱창집 사장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는데요.

어쩔 수 없잖아요. 나가는 사람이 손해 볼 수밖에. 그렇게 버텨봐야 자기만 손해지. 누군가 희생이 있어야 거래가 되는 법이니까요. 그래야 우리도 살죠. 안 그래요.          


뒷맛이 씁쓸했다. 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삶에 법칙이. 곰곰이 지나온 삶을 되씹었다. 나 역시 누군가와 그 가족의 행복과 성공을 지켜주겠다는 말로 그들의 삶을 먹잇감 삼아 온 것은 아닐지.          


TV에서나 볼법한 동물의 약육강식 생태계는 인간 세상에도 존재한다. 동물의 왕국에 삶과 죽음이 양면 하듯, 인생도 그렇다. 오늘도 누군가는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고, 누군가는 냉혹한 현실 앞에 무릎 꿇어 사라진다. 어떤 이는 누군가에 삶을 지켜보며, 보다 값진 삶을 살아가도록 보듬어주지만 누군가는 그 삶에 끝을 기다리며, 자신에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덮친다.           


맹수보다 초식동물 생존율이 높은 단 한 가지 이유는. 한 끼 식사가 아닌 한 번의 삶을 걸고 뛰는 초식동물의 절실함이리라. 코끼리가 무리 지을 때 강해졌듯 가족이 공동체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더욱 크고 오래간다.

내가 초식 세계에서 살기로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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