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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환 Mar 19. 2021

책이 안겨준 선물

책이 안겨준 선물    

 

내 작은 방안을 그득 채운 헌 책들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선물을 안겨준다. 3년 전쯤 하루하루를 쉼 없이 내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야심한 새벽달을 빛 삼고, 모두가 잠든 밤 저녁달을 벗 삼던 그때. 책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을 돕는 컨설턴트였다. 경력단절 여성과 다문화가족여성, 인생이막을 준비하는 시니어와 장애인, 지역 활동가들을 만나고, 그들이 주체인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일을 도왔다.    

 

일 년간 많게는 300회의 만남이 이어졌다. 컨설턴트의 일이라는 것이 조합 설립과 운영뿐만 아니라 매번 서로의 만남을 증명하는 사진을 남겨야 하고, 무엇을 했는지 수행한 사실을 일지에 기록해야 하며, 그 만남과 행위로 얻은 결과가 무엇인지를 빠짐없이 확인시켜야 했다.  그 시절 새벽 달빛을 보았던 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고, 저녁달을 벗 삼은 건 늦은 밤까지 내달린 그날의 흔적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빠듯한 일정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지쳐갔다. 오래된 배터리가 방전되듯 쉬이 피로했고, 무력감을 느꼈다. 시간이 거듭되자 이내 마음에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왜 일을 하는 것인가. 어두운 밤 불나방이 빛을 쫓듯 밤낮없이 일하는 삶은 행복인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나와 함께하는 가족은 행복할까.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사는 돈 버는 이야기와 성공이 우선이었다. 사석에서 가볍게 삶의 고민을 털어놓는 날이면 너 요즘 돈 좀 버나보다. 배부른 소리 하네.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처자식 딸린 남자가 그런 말 할 때냐며 핀잔 듣기 일쑤였다.   

    

불나방 같은 하루를 보내고 온 저녁 무렵. 피곤한 몸을 기댄 채 불연 듯 서재를 둘러봤다. 저 책은 언제 산 것들이었지. 책을 놓은 지 얼마나 오래됐길래 기억이 가물가물한가. 눈에 들어온 책 한 권을 쥐고는 낱장을 뒤적였다. 헌책 특유의 꿉꿉한 냄새와 손 끝에 전해지는 눅눅한 감촉이 와 닿았다. 책 귀퉁이에 적어 놓았던 작은 메모와 밑줄들. 아 예전에 내가 이런 글을 읽었었구나. 책의 낱장을 넘기며 풍기는 냄새가 좋았고, 그 속에 담긴 언어가 마음을 위로했다.      


3년간 777권의 중고책을 샀다. 매끈하고 깨끗한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다른 이의 흔적을 발견할 때면 이상야릇한 느낌이다. 그는 이 글을 어떻게 읽었을까. 새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매력이라고나 할까.


내 작은방은 책이 쏟아낸 에너지로 넘쳐 난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역사 속 영웅을 만나고, 인간의 존재와 진화, 문학과 철학, 미술, 종교, 심리, 일상에 삶을 공유하는 얼굴 없는 작가들과 무언으로 소통한다. 언제부턴가 서재와 벽면 심지어 방바닥까지 겹겹이 쌓인 책 제목을 보며, 나를 위로하고, 내일을 희망하며, 오늘을 기대한다.     

오늘도 습관처럼 알라딘의 요술램프(온라인 중고서적)를 슥슥 문지른다. 저녁 무렵이면 새로운 책 선물을 마주할 것이다. 세월과 함께 퇴적된 책 냄새를 맡으며 얼굴 없는 작가는 어떤 이야기보따리를 선물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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