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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환 Mar 22. 2021

글쓰기의 추억

자기 언어를 찾아서

점 하나가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점 두 개가 있으면 선이 되지요.

점 세 개가 있으면 면이 생겨요.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반드시 면面을 만들어야 해요.

여기다 점을 하나 더 보태면 깊이(높이)가 생기는데

그건 ‘말할 수 없는 것’에 닿는 거예요.

거기까지는 못 가더라도, 적어도 면은 만들어야 해요.

<불화하는 말들 / 이성복 시인>    

 

이성복 시인의‘불화하는 말들’을 읊다 불현듯 글쓰기의 추억이 떠올랐다. 글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2018년 여름 무렵이다.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출간이 가능한 시대. 다른 이들의 서사와 사유를 넘어 나에 언어를 담아내고 싶었다. 주제는 소상공인 협동조합. 우리나라에는 600만 명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살아간다. 지역에서 재배한 보리로 수제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 꽃송이를 엮어 예술로 승화시키는 플로리스트, 동네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모임. 식용 곤충을 키우거나, 유해한 벌레를 없애는 방역전문가도 있었다. 8년간 200여 개 협동조합과 인연을 맺었다. 삶이 다르고 방향도 제각각인 이들이 모여 만든 협동조합은 투자와 경영, 노동으로 구분되는 자본 중심의 회사가 아닌 모두가 참여하고 소유하며 경영하는 조합원이 주인인 사업체다.      

“그래 소상공인 협동조합 책을 써보자. 협동조합과 맺은 인연 안에서 꿈틀거렸던 삶의 희망, 때론 사람들과 부대끼며 걸어온 생존의 발자취를 그려보는 거다. 분명 관심 있는 이들도 있을 테고.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 설립하는지, 그렇게 만들어진 협동조합에서 어떤 일과 꿈을 키워가는지 알려주는 거다.   

  

여러 날 책 쓰기 과정을 알아보던 중 지인이 소개해준 아카데미 강좌에 참여하게 됐다. 9주 동안 글 쓰는 법을 배우고, 필요한 교본을 제공받는 대가는 300만 원. 참가자는 나를 포함해 4명이었다. 회사 대표는 대기업에서 브랜드와 홍보마케팅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일일특강 첫날. 1900년대 미국 뉴욕의 거리와 1912년 같은 거리의 사진 속 시대변화를 짚어냈다. 마차로 가득했던 뉴욕 거리는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과 산업혁명이 낳은 자동차로 대체되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변천사를 그럴듯하게 묘사하던 그의 결론은 책을 써야 된다는 거였다.        

 

아카데미 대표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예전에 어떤 일을 해왔는지,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책을 쓰고 싶은지 물었다. 한 사람씩 이야기가 돌고, 내 차례가 왔다.

최 선생님은 어떤 책을 쓰고 싶으세요?

저는 소상공인 협동조합 이야기로 써보고 싶습니다.

최 선생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협동조합이 몇 개나 있나요?

2013년 이후 18,000개가 설립됐습니다. 1년에 2,000천여 개 협동조합이 새로 생겨나고요.

최 선생님의 경험을 담아 협동조합 이야기를 쓰려는 건 이해하는데요. 책을 내면 몇 명이나 사볼까요? 자서전이나 소장용이 아니라면 상업 출판사 입장에서는 매력을 느낄 수 없을 텐데요.

그래도 굳이 그 주제로 쓰시겠다면, 4차 산업혁명시대의 협동조합으로 융합해보시면 어떻겠어요.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협동조합 좋잖아요. 뭔가 있어 보이고, 그래야 고객이 책을 집어 들죠. 내용보다 더 중요한 건 시대 흐름과 고객 니즈와 연결되는 콘텐츠예요. 아시겠죠.

대표의 말에 불편함을 감출 수 없던 나는 두 눈을 치켜세우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말씀 주신 4차 산업혁명과 협동조합은 상황도 다를뿐더러 제가 생각했던 내용과 너무도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글쓰기를 꼭 그렇게 해야 되나요. 이곳은 글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책을 내기 위해 모인 아카데미예요. 자비 출판하실 게 아니라면, 고집을 버리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날 이후 아홉 번의 수업이 왜 그리 힘겹고 착잡했던지. 나는 결국 책을 쓰지 못했다. 내가 지불한 돈보다 더 아까웠던 건 허무한 시간과 무엇보다 글 쓰는 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곳에서 배운 거라곤, 시대 흐름에 꼭 맞는 콘셉트를 찾아내고, 그럴싸한 목차를 구성한 후, 소의 젖에서 우유를 쥐어짜듯 A4 용지 두 장 분량의 상업용 글을 쏟아내는 것이다.   

  

2020년에도 글 쓰려는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 동안 유명 작가의 유튜브 영상을 반복해 봤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보필하며 얻어낸 글쟁이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그런 글쓰기를 막연히 동경했다. 여러 강연을 찾아보았지만 매번 글 쓰는 스킬을 말하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 글을 써야 한다는 비슷한 이야기의 나열뿐이었다. 그렇게 식상함이 채워질 무렵. 우연히 유시민의 알릴레오 유튜브 방송을 접했다. 몇 분 작가와 필명이 은유인 작가가 한자리에 모여 글쓰기 방법과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은유 작가의 이야기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글쓰기 스킬을 말하지 않았다. 니체의 생각과 삶을 말하고, 우리 주변의 숨겨진 일상을 말하며, 글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무엇인지를 사유했다. 그녀의 다른 영상을 찾았다. 아름다운 재단에서 강연했던 한 시간 분량의 글쓰기 영상을 발견한 날부터 운전할 때 반복해 들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100번은 보고 들었을까. 매일 같은 영상 속 은유 작가는 같은 모습,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내게는 항상 다르게 다가왔다.      

글을 잘 쓰라고 말하지 않았다. 글을 대하는 태도, 글 쓰는 사람의 내면의 성찰, 우리 주변에 어두운 삶과 실체를 바라보고 느끼며, 그것을 자신에 언어로 표현하도록 생각을 넓혀줬다.     


2021년 1월 5일. 감응의 글쓰기 수업이 있던 날. 은유 작가와 학인들의 첫 만남이 있었다. 누군가를 이리 오래 기다렸던 기억이 있을까. 내가 수업에 참여한 이유는 책을 내기 위함이 아닌, 글을 쓰기 위함이다. 학인들의 절절한 사연과 가슴속 눈물을 마주했다. 근래에 가장 많은 이의 눈물을 보아서였을까. 학인들의 삶을 녹여낸 눈물은 메마른 내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수업이 끝나고, 학인들이 한 사람씩 집으로 발걸음을 향할 무렵. 나는 책 한 권을 쥐고 쭈뼛대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혹시 괜찮으시면 싸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기다린 듯 환한 미소로 ‘싸인이요. 환영합니다.’ 말하고는 손에 쥔 볼펜으로 부드럽게 글을 새겼다.   

   

최정환 님‘자기 언어를 찾아서’     


내게는 글쓰기를 위해 걸어온 추억이 있다. 책이 아닌 글을 써 내려가는 학인으로 책을 벗 삼고, 삶을 돌아보며, 주변을 살펴보는 오늘. 나는 비로소 자기 언어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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