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알을 품은 지 열여섯째 날. 앞으로 열두 밤을 더 지새면 생명의 이야기 꽃이 피어날 것이다.
내가 여섯 살 무렵이었을까. 다섯 식구가 살던 단칸방 구석, 아랫목 이불 위에는 열 개 남짓 알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이불을 덮어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가며 온기를 유지했다. 어느 날인가 삐약삐약 노란 생명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린 시절 병아리를 처음 마주한 날의 기억이다.
얼마 전 큰 맘먹고 부화기를 샀다. 예전처럼 아궁이에 나뭇가지와 땔감을 넣어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다. 부화기 상자의 온도를 맞추고 물을 채우면 적당한 습도가 유지된다. 정해진 시간에 알이 굴려지고 그렇게 이십팔 일을 품으면 새 생명을 마주 할 수 있다.
내가 부화기를 사려고 마음먹었던 건. 가족의 공동 관심사가 조금씩 사라졌기 때문이다. 가족의 일상은 늘 그렇다. 아빠는 일에 바쁘고, 아내는 육아와 살림을 도맡는 일상에 치이고, 아이들은 학교와 방과 후 수업에 자투리 시간에는 핸드폰 보기도 빠듯하다. 가족 서로는 딴생각으로 살아간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은 부쩍 말수가 줄고, 컴퓨터를 응시하는 시간이 늘었다. 요즘에는 이른 사춘기가 온다는 말에 걱정이 앞선다. 가족의 울타리를 가꾸고 살피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현재 상황을 바꾸기 위한 변화가 필요했다.
막내아들 뽀송이(비숑프리제)와 수족관 물고기들, 백와 달팽이 두 마리까지. 반려 식구들을 데려오게 된 계기다. 한 녀석들씩 데려올 때면 아내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며 따져 묻는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만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다. 녀석들과의 동거로 자연스레 소통하는 가족의 모습을 꿈꿨다. 뽀송이의 재롱이 기쁨이 되고, 느릿느릿 달팽이의 미세한 움직임을 이야기하며, 물속에서 헤엄쳐 노는 물고기들이 대화로 이어지는 꿈 말이다.
처음 몇 번은 수족관 물고기를 건져 이리저리 살피기도, 작은 밥그릇에 옮겨가며 장난질도 하더니 이제는 뜸하다. 달팽이 먹이를 챙기겠다며 상추 잎을 정성껏 챙기던 모습도 가물가물하다. 평상시 아이들은 허팝과 같은 유튜버 채널을 보며 흥미를 느낀다. 핸드폰 게임에 빠져드는 날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니 가족의 대화는 설자리가 없겠다.
오리알을 품게 된 건 모두의 관심거리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매일 밤 옹기종기 붙어있는 여덟 개 알을 보며 아들이 묻는다.
병아리 언제 태어나요.
이제 열두 밤만 자면 태어나겠다.
빨리 만나고 싶네.
아빠도 그래.
짧은 대화지만 그 시간만큼은 핸드폰도 없고, TV도 꺼진 온전한 가족의 대화가 좋다.
잠자는 알을 살포시 꺼내 들어 손전등 불빛을 비추고 안부를 살핀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 고 남은 날을 되뇐다. 그저 평범한 알이지만, 냉장고에 있었더라면 프라이팬에 톡톡 부딪쳐 깨졌을 텐데. 다행이다. 냉장고가 아닌 부화기 안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니 말이다. 아이들은 오리를 빨리 보고 싶다며 보챈다. 나는 지그시 알을 살피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함에 미소 짓는다. 그 짧은 시간 부자는 새로운 기대와 기다림으로 설레어한다.
오리알은 나와 가족의 대화를 연결하는 소중한 존재다. 서로에 하루를 묻지 않는 가족 안에서 오리알에 안부를 묻고 변화를 살피며, 내 안에 설렘을 말하는 마음에 창이라고나 할까.
열두 밤 뒤면 알이 깨어날 것이고,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은 또 다른 가족의 대화 소재가 될 것이다. 내가 오리알을 품는 건 그렇게라도 가족의 끈을 놓치지 않고 울타리를 지키고 싶음 이겠다.
며칠 전 아내에게 훅하고 던진 말에 핀잔 들은 적 있다.
집에 고양이 한 마리 데려오면 어떨까.
아내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매섭게 바라봤다. 집도 작은데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멋쩍은 듯 근데 고양이가 털이 많이 빠지긴 하지.
앞으로 우리 집에 어떤 새 식구들이 들어올지는 장담할 수 없겠다. 혹여나 새로운 식구가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 지나친 호기심이 아닌, 가족의 소통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아빠가 집에서 뽀송이와 대화하거나 넋을 잃고 수족관 물고기와 달팽이를 바라보는 날이면 소통의 허전함을 달래려 애씀을 알아차리길 바란다고.
머잖아 알이 깨어나면
가족은 웃고, 생명의 이야기꽃이 피어날 것이다.
그 설렘을 안고 새 생명의 깨어남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