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도 마음에 마중물이 있다. 요즘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 자연스레 두 분의 대화는 끊기고, 마음에 골도 깊어졌다. 날이 거듭 될수록 두 분의 문제는 가족 모두에게 확대됐다. 오해와 미움, 서운함은 쌓여 어느새 분노로 자리 잡았다. 두 분은 서로를 원망하며, 화해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다. 네모난 마당을 끼고 주인집과 사글세를 사는 두, 세 가구의 집이 모여 살았다. 대여섯 살 무렵 어린 나이임에도 이곳이 우리 집이 아님을 알았던 것은 세 들어 사는 삶이 집주인과 조금은 다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러 가구가 모인 공동체 삶에는 나름에 질서가 유지된다. 하나뿐인 푸세식 야외 화장실과 펌프는 주인집 소유물이다. 혹여나 우리 집이 먼저 쓸라치면 주인집 눈치를 살펴야 했다. 사글세 집은 우리 가족의 안식처이자 울타리였고 철부지 아이들에겐 최고에 놀이터였다. 마당 가운데는 빨간색 넓은 고무 다라와 여기저기 찌그러진 양동이가 나동그라져 있고 사이로는 녹슨 펌프가 우뚝 서 있다. 70년대는 지금처럼 수돗물이 없었다. 대부분 동네 집들은 식수 공급을 위해 지하수나 펌프를 사용했다. 펌프로 물을 먹기 위해선 한 바가지 물이 필요했다. 애들 키만 한 펌프 위로는 동그란 구멍이 있다. 한 바가지 물을 붓고 위아래로 펌프질이 이어지면 이내 신기하게도 물이 콸콸콸 쏟아진다. 생명수인 펌프질이 아이들에겐 재미난 놀이였다. 물 갖고 장난친다는 꾸중을 듣고도 펌프질은 계속됐다. 펌프에서 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한 바가지 마중물 덕분이다. 손님을 맞이하듯 물을 부어 뿜어 올리는 새물. 마중물이다.
며칠 뒤 두 분이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해 아내와 찾아뵀다. 아버님은 오늘도 막걸리 한 사발과 안주거리로 위안을 삼고 계셨다. 아내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빠! 요즘 일하느라 힘들지! 정육점 일이 쉽지 않은데. 아빠가 한 평생 우리 가족을 위해 애써 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모두 아빠 덕분이에요. 매일 술에 취해 어머님을 못살게 구는 상황을 탓할 줄 알았다. 뜻밖이었다. 아내에 작은 위로는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아버님의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평화를 되찾았다. 마중물을 아끼다간 영원히 펌프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을 맛볼 수 없다. 몇 바가지 마중물이 몸에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하듯 가족의 마음을 열어 서로를 치유하는 감동을 만든다.
한 바가지면 충분하다. 가족을 위해 마중물을 부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