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국물에 담긴 장모님의 마음

뽀얀 국물에 담긴 장모님의 마음

by 최정환

뽀얀 국물에는 장모님의 마음이 스며있다. 몇 분 째. 보글보글 야단스레 끓어대는 뚝배기에는 우유 빛 국물과 얼기설기 썰어 놓은 소고기 사태와 양지머리로 가득 찼다. 돌돌 말은 삶은 국수와 송송 썬 대파를 한 움큼 쥐어 올리고 천일염 소금과 후추 가루를 몇 번 툭툭 떨어내면 비로소 음식의 조화를 이룬다.

걸쭉한 국물에 밥 한 공기를 덜어 정성껏 섞어주고, 휘휘 저어 한 숟가락을 들어 올린다. 국물을 머금어 살짝 부푼 밥 알갱이와 잘게 썬 파 채, 무지개 빛 사태를 얹어 크게 한 입 넣으면 입안은 온통 사골국의 따듯함과 깊은 풍미로 가득해진다.


아침 일찍부터 장모님의 몸놀림이 분주했다. 사골국을 끓이기 위해서다.

30년 넘게 장위동 시장에서 정육점을 하시는 아버님(장인어른)께서 육수를 우려내기 위해 손수 사골을 썰어 오셨단다. 사골의 깊은 맛에 감칠맛을 더하는 잡뼈도 한 바구니 섞여 있었다.


큰 대야에 사골을 옮기고 찬물을 채워주면, 이내 맑았던 물이 조금씩 붉은색으로 물들여진다. 이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새물을 넣어 버리기를 서너 번 반복했을까. 이제야 투명한 물속 사골들이 형태를 드러낸다.


팔팔 끓는 물통에 사골을 넣으면, 아직 빠지지 않은 붉은 물이 응고되어 찌꺼기를 이룬다. 미리 받아 놓은 찬물에 사골을 첨벙 담그면 기름덩어리와 이물질이 정체를 드러낸다.


장모님은 통 옆 앉은뱅이 의자에 걸터앉아 사골 하나하나를 건져내 정성껏 닦아냈다. 한두 개도 아닌 수십 개의 반복된 과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인내심을 자극했다.


깨끗하게 손질된 사골은 곧장 국통으로 옮겨지고, 끓어오르는 물속은 사골에서 뿜어 나오는 뽀얀 육수로 조금씩 그 색을 더한다. 중불로 끓이기를 반나절. 이렇게 우려낸 육수를 덜어내어 두 번, 세 번을 더하면 한 통에 섞어 비로소 진국이 완성된다. 사골국의 깊은 맛은 이렇게 오랜 기다림과 정성의 시간으로 하나가 된다.


총각무를 집어 들고 한 입 우두둑 베어 물면 무김치의 아삭아삭함이 씹는 맛을 더하고 새우젓과 고춧가루의 절묘한 버무림으로 풍미와 감칠맛을 자아낸다. 뜨끈한 사골국물 한 사발은 마음의 피로를 녹이고 먹는 즐거움과 행복을 준다.


장모님은 사골 국을 끓이는 내내 불편한 허리를 지탱하기 위해 복대를 둘러맸다. 퉁퉁 부은 종아리 여기저기에는 아픔을 달래려 수놓은 뜸 자국들로 선명했다. 사골 국 한 사발을 떠주시던 장모님이 넌지시 말씀을 건네셨다.


여보게 사위 내가 몸이 아파 맛있는 음식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네.

오늘 하루가 지나면 나는 나이를 먹고, 자네도 조금 더 나이를 먹을 걸세.

세월이 그렇다네. 쉬이 흘러간다네.

젊을 때 사골 국 한 그릇이라도 더 먹고 기운 내세. 자네가 건강해야 가족이 행복하네.


어디선가 사골 국을 먹을 때면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국물을 들여다본다.

뽀얀 국물을 잠시 들여다보면 장모님이 보이고 이내 따듯함이 느껴진다.

가족을 생각하며 오랜 기다림과 정성으로 담아낸 진심에 마음.

사골의 깊고 진한 맛 속에는 장모님의 마음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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