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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마 Jan 13. 2024

갑자기 걸려온 전화, 그리고 늘 나는 후회한다

언제부터인가 자주 연락하지 않던 지인이 전화를 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아마도 우리의 나이가 경사 보다는 조사연락이 많이 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엄마를 늦게 낳아서 촌수가 높았고, 그런 엄마가 또 결혼을 늦게 했으니 나도 나이에 비해 촌수가 높았다.


엄마의 조카가 촌수로는 나에겐 사촌언니였지만, 나이대로는 이모벌이었다.

엄마와 그 사촌언니는 유달리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같은 사이였고, 엄마가 결혼하기전에는 이모 조카 사이이긴 하지만 친구보다도 더 자주 만나면서 젊음을 만끽하며 놀았다고 한다.

사실 엄마도 그 언니도 미모에서는 빠지는 분들은 아니었으니...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몇십년이 지나고서도 그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곤 했다.


나의 기억속에서도 초등학교때부터 우리 가족과 사촌언니네 가족은 자주 만나서 저녁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촌언니의 아이들은, 내 조카뻘이지만 나이차이는 고작 3,4살 정도 어린 동생들이어서 우리는 언니, 동생 하면서 재미있게 놀곤 했다. 사실 어린 우리들에게는 촌수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내가 이모다 조카다라기보다 언니 동생하면서 놀기엔 충분했던 것 같다.


형부는 의류회사에 부자재를 공급하던 회사를 운영했었는데, 그당시 큰 의류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자연스럽게 형부가 하던 회사도 운영이 어려워져서 언니네가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어졌고, 우리집과의 만남도 차츰 차츰 소원해지더니 어느 순간 일년에 한두번 소식 전하는 사아기 되었다.

우리 역시,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생활이 어려워졌고 각자 살기에 바쁜 나머지 연락할 생각은 못하고 각자의 생활을 하면서 몇년간을 연락 없이 지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연락이 이어진 사건이 있었다. 사촌 언니네 부부는 베트남에서 사업을 찾다가 형부가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형부와 안맞았는지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사이 우리의 생활 역시 10여년의 시간이 지났기에 조금은 나아졌다고는 볼 수 있지만, 예전과 비교해서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여유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엄마와 사촌언니는 비슷한 상황이었는지라 다시 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서로의 힘든 상황에 의지도 하면서 위로하고 힘을 낸 것 같았다. 엄마는 건강에 대한 염려와 우리에 대한 걱정, 사촌언니는 형부의 건강과 현 상황에 대한 걱정이 비슷했기에 둘은 또 다시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의지가 된 것 같다.


그렇게 또 몇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동생과 나 그리고 사촌언니의 딸도 결혼을 결혼을 하고, 아이들 낳으며 키우는 동안 엄마는 동생의 집에서 초등학생이 된 동생의 아이들을 돌봐 주게 되었고, 사촌 언니는 조카가 결혼하면서부터 함꼐 살았기에 조카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림도 도와주며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늘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안부를 전하며, 힘든 매일의 일상 속에서 무탈함에 감사하는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계속 되었다.


2016년 아주 추웠던 겨울, 엄마가 사촌언니의 손자가 중학교 졸업을 한다고 해서 엄마가 축하해 주면서 용돈도 준다고 사촌언니의 집에 들렀다 온 다음날이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이브날아침이었고, 나는 아이와 눈썰매장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짐을 싸고 막 출발한 참이었다.

그 때, 동생에게 걸려온 전화에서 나는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고, 엄마가 몸이 안좋아서 링겔을 맞으러 병원을 가려고 함께 나오다가 아파트 현관입구에서 쓰러지셨다고 들었다.

그 순간, 어떻게 운전을 해서 동생네 집 앞으로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렇게 엄마는, 아주 추웠던 2016년의 크리스마스 날 아침, 돌아가셨고, 나는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엄마의 부고 전화를 해야 했다. 그 전날까지 사촌언니의 집에 가서 함꼐 이야기하고 차 마시고 했던 터라 언니에게 엄마의 부고 전화를 할 때 언니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에는 나 역시 자주 사촌 언니를 만나곤 했는데, 막상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일년에 한두번 안부 전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내가 회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몇년은 그냥 지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내 전화기에 뜬 사촌언니의 이름을 보고 나는 순간 망설여졌다.


설마, 아닐거야...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오랜동안 병명도 모른채 힘들어 했던 형부가 어제 밤 늦게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좀 더 자주 전화할걸.. 한번이라도 찾아가볼걸.. 매일 출퇴근때 다니던 길인데...


늘 지나고 나면 후회를 하게 된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난 엄마와 하고픈 것들을 이런 저런 핑계로 뒤로 미루기만 했던 것을 너무나 후회했다. 엄마와 다음에 호캉스를 해야지, 엄마와 다음에 맛있는 장어 먹으러 가야지, 엄마와 다음에 뮤지컬 보러 가야지, 엄마와 영화 보러 가야지... 등의 작은 것들조차 회사일이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었던 내가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또 이렇게 부고 전화를 받으니, 또 후회가 된다.


앞으로도 나는 수많은 부고 전화를 받을 터이다. 그럴때마다 또 더 자주 안부를 물을걸, 더 자주 만날걸 하는 후회를 하게 되겠지.


잘 지내?

응, 별일 없어. 너는?


이 짧은 인사가 왜 그렇게 하기 힘들다고 느끼는걸까? 오늘부터라도 다시 소중한 인연들에게 인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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