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디로그] 붓을 떼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by 촘디

팔레트에 이어 내가 내딛는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그림 그리기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았다.


스케치 없이 쓱싹쓱싹 손과 마음이 가는 대로 색을 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케치 없이는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이는 일의 과정을 대하는 성향의 차이도 있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결과를 생각하는 관점에 따른 차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스케치 없이도 붓을 들고 한 번에 뚝딱뚝딱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베테랑이 있는가 하면,


내가 원하는 혹은 남들이 보기에 '멋진 예술 작품'이라고 보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나의 손이 나의 마음이 가는 대로 완성한 작품 그 자체에 만족한다면 그 생각 차이에서 나오는 차이인가 싶기도 하다.

결국에는 이 둘에는 맞고 틀린 정답은 없는데,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꼼꼼히, 스케치를 모두


빠짐없이 그러고 나서 틀리지 않도록 꼼꼼히 따라 그리거나 색칠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최근에 든 생각은, 이렇게 완벽히 스케치를 하더라도 결국에 색을 칠하는 과정에서 가끔은 엇나가서 정확히 그려지지 않을 때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잘못 칠한 물감조차도, 더 어두운 색으로 덮을 수가 있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 하나뿐이 없는 작품이 되고, 그 작품만의 스토리가 탄생할 수 있다.



약 1년반 전의 나는 퇴사를 두고 아주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나는 스케치 없이는 색칠을 시작할 수 없어'라는 말을 앞세워 퇴사 자체가 마치 돌이킬 수 없는

검은 물감을 든 붓으로 한 획을 그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사 전, 다음의 이직이 결정되었거나 혹은 다음 방향성이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채로 무작정 퇴사하는 것은 나에게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퇴사의 성격은 단순히 지금 칠하고 있던 그 붓을 잠시 떼는 것 아닐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붓을 바꾸기 위해서, 다른 색을 칠하기 위해서, 혹은 물을 더 묻히기 위해서 붓을 떼기 마련이다. 색칠하고 있던 붓을 캔버스에서 잠시 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때에 우리는 새로운 시작 앞에서 가장 크게 망설이지만,


가끔은 현재 하고 있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도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내가 지금 현재의 삶을 잠시 중단하고 싶지만 그다음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아 고민만 하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붓을 잠시 떼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붓을 떼고 연필을 다시 잡고 스케치를 해도 좋다.


다른 색의 물감을 사용하려고 붓을 잠시 떼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원래 쓰고 있던 색이 더 좋을 수도 있다.


다시 그 놓았던 붓을 쥐면 된다. 같은 색 물감을 한 번 더 묻혀 좀 더 진하게 표현해도 좋고,


물을 살짝 묻혀서 농도를 옅게 다시 시작해도 좋다.


분명한 것은, 붓을 떼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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