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는 복구하지 말고, 일단 보존하라 2

[불난 집 아랫집의 간접피해 보상기] 18화

by 조서경

[본 글은 개인 경험 기록이며, 개인적 판단을 포함합니다. 상세 고지는 글 하단을 참고하세요.]


이번 이야기는 화재 간접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즉시 보관해야 할 증거와, 현장에서 흔히 범하는 실수를 피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피해가 눈에 보이고 뚜렷하면 따로 입증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간접피해의 경우는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 화재로 인해 지난 1년간 고생을 많이 했다. 물론 면밀하게 준비 잘하는 성향이 아닌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됐을 수는 있다.


에니어그램의 9가지 성격 유형의 하위 개념을 공부할 때 제시된 예시가 나와 똑같아서 재밌었다. 같은 성격 유형이라고 해도 하위 유형(생존 본능)이 자기 보존적인지, 개인적인지, 사회적인지에 따라 상황 대응이 다르다고 한다. 같은 하위 유형끼리 소그룹에서 토론할 때 '등산 가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우리 그룹은 ‘핸드폰으로 신고한다’, ‘동료들과 함께 길을 찾는다’ 등 실용적인 대안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다른 한 그룹에서는 '길을 잃을 리가 없지요'라는 답변이 가장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늘 치밀하게 준비하고 사전 답사까지 다녀오는 성격이라 길을 잃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강사님은 행사할 때 실제로 '이 근처 다 왔는데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라고 막판에 전화하는 이들은 내가 속한 성격군이라고 했다. 다른 그룹은 행사의 규모, 개요, 순서, 강연자의 이력, 근처 맛집까지 이미 싹 다 조사를 마친 상태라서 길을 헤매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예행연습보다는 발생 후 대응하는 편이다. 이 글은 나처럼 미리 준비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쓰고 있지만, ‘싹 다 미리 조사’ 그룹, 즉 ‘준비파’의 준비에도 참고가 되면 좋겠다.


피해를 보관하기 힘든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피해라고 생각을 못 하고 습관처럼 복원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옷이 지저분하면 세탁하거나 세탁소에 맡기고, 먼지가 있으면 닦고, 몸이 아프면 약을 먹었던 것처럼,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후회된다.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자 입장’으로 상황을 인지하고, 의식적으로 증거 보존을 우선해야 한다.


물론 피해자가 피해 물품을 살리려고 노력해서 복구하면 그 복구 비용은 보험에서 보상한다. 반대로 일부러 피해를 입히려고 한 것들, 예를 들면 물이 떨어지는 곳에 물건을 내놓는 경우 등은 보상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내 경우에도 최초 피해보상 추정액에는 세탁비와 청소 용품비가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세탁 후에도 옷이 복구되지 않았고, 기타 피해 입증 자료를 제시하자 폐기 물품을 보상하고 대신 세탁비와 청소 용품비는 제외했다. 폐기 물품은 감가 상가해서 60~70% 받고, 세탁비와 청소 용품비는 보상되지 않으니, 보상받는다고 해도 피해자의 손실은 계속 누적된다.


그리고 다 복구된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내가 가입한 보험의 경우는 단 한 차례의 복구 비용만 보상했기 때문에, 두 번째 세 번째 세탁 비용은 다 피해자의 부담이다. 따라서 복구를 시도할 때는 사전에 계획을 세워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돌아보면 가장 아픈 시간은, 2024년 추석 전에, 윗집 화재 진압에 투입된 물이 흘러내려 집이 동굴처럼 차갑고 축축해졌을 때, 책이 젖을까 봐 절절매며 제습했던 때다. (2화, 4화) 그때 제습기를 구해 40리터의 물을 제습하지 않았다면 책이고 옷이고 다 젖지 않았을까. 그러면 보상 협상도 더 쉬웠을 것이고, 몸도 다치지 않았을 것 같다.


제습했다고 피해를 막을 수도 없었다. 나는 연기는 집에 들어와도 바람 따라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화재 연기는 화재 현장에서 발생하는 온갖 해로운 물질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 중에는 유기물이 불완전연소할 때 발생하는 다환방향족탄화수소가 들러붙은 초미세먼지도 들어있다. 이 먼지는 실내에 흡착되어 남아있고 쉽게 외부로 사라지지 않는다. 나도 경험했고, 한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확인한 사실이기도 하다. 거기다 윗집에 투입된 화재 진압수가 흘러내려 습도가 높아지면서 유해 물질의 실내 흡착이 더 심해졌다고 생각한다. (4,5,7,9화) 화재를 진압한 물은 이미 깨끗한 물도 아니다. 화재 당일 전등갓과 화장실 환풍기로 물이 흘러내렸는데 노란색의 지독한 냄새가 나는 물이었다.(2화)


세탁과 청소도 나처럼 하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축축하고 냄새나는 옷을 세탁소에 맡기겠다고 손해사정사에 연락했고, 청소한다고 알리고 청소업체를 섭외했다. 하지만 세탁했는 데도 옷이 복구되지 않았고, 청소했는데도 집이 복구되지 않았다. 화재 연기, 화재를 진압한 물, 그로 인한 냄새는 참 지독한 것이어서 한 번의 세탁과 청소로 복구가 안 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가입한 보험 기준으로는 복구비가 1회만 지급돼 추가 복구 비용은 모두 피해자의 부담으로 남았다.


이 과정을 다시 겪는다면, 피해 정도를 확인한 뒤에 하나하나 보험사의 안내를 받을 것 같다.

~~ 옷의 상태가 이런데 세탁해야 할지, 폐기를 해야 할지,

~~ 세탁했는데도 복구가 안 되면 몇 번이나 세탁할 수 있는지

~~ 세탁비가 한 번만 나오는데, 세탁 후 복구가 안 돼서 폐기하면, 폐기 물품비와 세탁비가 다 나오는지

~~ 복구가 안 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지금 폐기하면 어떨지

~~ 그럼 좋은 세탁업체나, 청소업체를 소개하거나 보내주실 수 있는지


앞서 회차에 밝혔듯이 나는 세탁을 여러 차례 하고도 냄새가 다 가시지 않아서 사용하지 못하다가, 세탁 건조기에서 분진이 모이는 것을 보고 다 폐기했다. 화재의 양상이 모두 다르니 결과도 다를 것이지만 처음부터 세탁과 폐기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결정하면 어떨까 싶다.


매캐한 냄새나는 옷이나 침구류, 가죽류에는 먼지가 눈으로는 잘 안 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화재 분진이 모이는 곳이 있었다.


주방용품 중 구멍이 있고, 수납장 밖에 놓여있던 것. 예를 들어 커피포트에는 먼지가 잘 모인다. 화재 이후 한동안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지 않았다. 차를 마실 정신도 없었고, 이것저것 늘어놓은 것이 많아서 한쪽으로 밀쳐뒀었다. 나중에 뚜껑을 열어보니 안에 검은 먼지가 구름처럼 쌓여 있었다. 화재청소업체의 권고에 따라 약품으로 세척하고 여러 차례 물을 끓여 버렸다. 이 역시 사진을 찍고 샘플을 밀봉 보관해야 했다.


신발 깔창 옆구리에도 시커먼 먼지가 많이 붙어 있었다. 신발은 옷을 세탁할 때 함께 세탁소에 보냈었는데, 운동화 두 켤레는 가죽이 변형될 수 있다고 돌려보냈다. 좋아하는 운동화라 그 브랜드에 세탁 여부를 문의하려고 살펴봤더니 깔창 옆구리에 먼지가 잔뜩 붙어있는 것이다. 내가 집에 주로 있고, 다니는 곳이 한정돼 있는데, 그렇게까지 새카만 먼지가 잔뜩 끈적끈적 붙어있을 일인가. 이런 걸 발견하면 순간 짜증 나고, 끔찍하고, 진저리가 쳐져서 이성을 잃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이 역시 차분히 사진 찍고 밀봉 보관했어야 했다.


평상시에도 청소하다 보면 먼지가 많이 끼어있는 곳들이 있다. 화재 분진도 그런 곳에 모인다. 서랍의 움푹한 손잡이 안쪽. 문양이 있어서 패인 곳들. 가구의 경첩 사이, 전자제품의 안쪽, 컴퓨터 키보드 사이에도 매캐한 화재 분진이 모인다. 위에 적은 모든 곳은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곳들이다. 가려진 곳들, 서랍장 안에, 옷장 뒤쪽 등에는 분진이 모여있을 수 있다.


구석구석에서 화재 분진의 피해를 확인하는 이유는, 그 주변에 복구하기 힘든 물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먼지 쌓인 주전자가 원목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면, 원목 테이블에도 같은 먼지가 흡착되었을 것이라 피해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청소는 청소기나 스팀청소기, 헝겊 걸레를 사용하기보다는 물티슈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계속 청소기를 사용하다 어느 날 물티슈로 닦았더니 새카만 먼지가 닦였다. 방바닥에서 그렇게 새카만 먼지가 닦이는 것도 처음 보았다. 도롯가도 아니고, 역 주변도 아니고, 공장지대도 아닌 곳에서 나올 먼지 색깔이 아니었다. 놀라서 사진은 찍어 두었는데, 비닐봉지에 넣어 밀봉까지 해두면 더 좋았을 것이다.


화재 간접피해의 특징은 복합적이고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화재가 난 당일, 냄새가 심한 며칠 안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을음과 윗집에서 쏟아진 물로 집이 엉망이 돼버린 경우, 전문적인 청소도 여러 차례 해야 하며, 상당한 기간 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어렵고, 복구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재도구도 얼마 안 되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에는 그을음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처음에는 피해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시간을 두고 차차 화재분진과 습기로 인한 피해가 전면적으로 발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경험으로 보면 화재 분진은 강한 매캐한 냄새가 나고, 호흡기와 피부 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비염, 인후염, 탈모, 피부염, 관절염, 힘줄염 등 화재 이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염증 질환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보험사는 간접피해를 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큰 손실이 피해자 몫으로 남는다. 그래서 모든 피해는 즉각 복원하지 말고 일단 보관하자고, 그래야 화재로 인해 잃어버린 재산, 건강, 시간에 대해 피해 주장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 글은 개인의 경험을 정리한 기록입니다. 관련 서류와 자료(증빙)는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유사한 상황에 처한 분들이 빠르게 대응하는 데 참고가 되도록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포함된 의학적, 과학적 내용은 개인의 경험과 참고 자료 및 제삼자의 의견을 종합한 개인적 판단이며, 전문적 검증이나 수치화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본 게시물은 고의적 비방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사실 관계의 오류가 발견될 경우 정정하겠습니다. 현재 이 사안은 금융감독원에 정식 접수되어 조정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접수번호: 202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