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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 세상

by 핑크리본

온 세상이 하얗다.


미세하게 흩날리는 가는 눈을 먼저 본 큰 아이가 "엄마 눈 와요"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옆에서 코를 박고 책을 읽던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봤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눈에 힘을 주고 허공을 응시했다. 이내 좁쌀 같은 눈송이가 듬성듬성 날리는 게 보였다. "오늘 눈소식이 있었나"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가랑눈은 밀도를 높여 유리창을 빼곡히 채워 내리고 있었다.


거실 통유리창에 면한 책상에 앉아 시선을 위로하여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얗고 미세한 눈 조각이 아래로 떨어지다 일부는 나무 가지 위에, 일부는 소나무의 가는 이파리 위에, 화단 풀들 위에, 집 앞 꼬불하게 나 있는 오솔길 위에 빠른 속도로 내려앉았다. 정원사가 둥그렇게 다듬어 놓은 키 작은 회양목 위로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습이 설탕 파우더가 뿌려진 둥근 케이크처럼 보였다.


눈이 펑펑 내리자 집 앞 오솔길로 드나들던 인적이 드물어졌다. 자전거를 바삐 몰아 집으로 향하는 남자아이 둘을 제외하곤 삼십 분째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있다. 모두들 눈을 피해 지하 주차장 길을 이용해 집으로 상가로 지하철역으로 가고 있겠지. 2월로 들어서면서 봄 공기를, 봄 햇살을, 봄 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설경을 보며 '내가 겨울을 몰라봤구나' 싶었다.


아이들은 거실 유리창에 붙어 제 폰을 꺼내 나란히 서 눈을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담아내느라 여념 없었다. 바깥 풍경을 담으려 밖을 보며 나란히 선 아이들의 뒷모습이 귀여워 '아이들의 뒷모습을 담아야겠다' 생각하는 찰나 큰 아이가 촬영을 마치고 돌아서 아쉽게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지 못했다.


인적 드문 오솔길에 깨끗한 눈이 쌓였다. 작은 아이가 새하얀 눈을 보고는 "밖에 나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아빠 오면 같이 나가보자"며 외출을 잠깐 미루었다.


곧 남편이 퇴근해 왔고, 저녁으로 떡볶이 세트를 포장주문해 놓고는 옷을 단단히 여며 입고 남편과 픽업하러 나섰다. 밖은 겨울이라 6시에도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가로등불이 들어와 있었다. 가로등 빛을 받은 눈이 반짝였다. 관리센터 직원들이 큰 넉가래가 달린 제설차량을 몰고 나와 웅웅대며 눈을 갓길로 밀어내고 있었다. 바닥을 드러낸 인도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막 내려 얼지도 녹지도 않은 깨끗한 숫눈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손을 잡고 걸었다. 가는 길 곳곳에서 넉가래를 들고 부지런히 눈을 치워내는 관리센터 직원들이 보였다. 덕분에 여태 미끄러지지 않고 길을 오갈 수 있었구나, 싶었다.


뽀드득뽀드득. 운동화 밑으로 건설이 우드득 밟히는 느낌과 소리가 좋았다. 뽀드득뽀드득.


눈이 펑펑 내릴 때 베르사유 궁전 오케스트라의 비발디 사계 겨울 악장을 유튜브로 찾아 아이들과 함께 들었다. 눈앞에 하얀 눈이 세차게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고 머리를 질끈 묶고 연주에 심취한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플레즈니악의 겨울악장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