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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부르는 꿀조합

임윤찬과 강풀과 독서와 커피

by 핑크리본

남편이 떠났다.

두 아이를 모두 데리고

따뜻한 커피를 남겨둔 채.



어딘가에서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려와 의식을 불러냈다. 남편이다. 남편이 큰 아이에게 아침으로 "프렌치토스트 어떠냐"고 묻고 있었다. 잠에서 막 깬 나는 "여보"하고 그를 불렀다. 남편이 내게로 와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밥을 먹이는 게 어떨까. 국 데워서." 아이는 분명 오늘도 점심으로 마라탕을 먹을 것이다. 아침은 든든히 먹여주고 싶었다. 남편과 아침밥을 이야기하는 동안 양팔을 아무렇게나 위로 올리고 무해한 얼굴로 자고 있던 둘째가 몸을 뒤척이며 스르르 깰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홉 시 십 분에는 나가야 안 늦을 것 같아." 남편은 외출 준비시간과 약속장소로 이동시간을 어림해 계산하고는 일찍부터 서둘렀다. 남편이 국과 밥을 따뜻하게 데우고 계란 프라이를 곁들여 아침을 차려내는 동안 나는 둘째 아이가 입을 옷을 함께 고르고 머리를 단정히 올려 묶어 주었다.


아이들이 밥을 먹는 동안 남편은 커피를 내렸다. 게이샤 원두를 분쇄하고 드리퍼에 담아 가는 물줄기를 부어 커피를 정성스레 내렸다. 커피를 내리는 남편의 옆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진한 원두의 향이 부엌을 가득 채우고 거실로 흘러나왔다. 내려진 커피의 반은 하얀 텀블러에 담아 식탁 위 보이는 곳에 올려 두고, 나머지 반은 내 몫으로 남겨 주었다.


남편은 오늘 친구와 약속이 있다. 각자 자신들의 아이를 데리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큰 아이는 학원에 내려주고 작은 아이를 데리고 과천으로 간다. 아이들이 방학하고 처음으로 맞는 자유시간을 나는 오늘 가질 예정이다.


외출 채비를 마친 남편과 아이들은 잘 다녀오겠노라, 웃으며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나는 지금 거실 책상에 앉아 남편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열어 글을 끼적이고 있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반투명 글라스 컵에 얼음을 한가득 퍼담은 후 남편의 스페셜티 커피를 조르르 부었다.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마시고는 커피 맛에 어울리는 단어를 머릿속을 뒤져 찾아내고 있다. 맛을 표현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느낀다. 남편의 커피는 산미가 적당하고 후미가 클린하다. 청량한 차 같다. 스페셜티 커피를 즐기고부터 프랜차이즈 커피를 먹지 않게 되었다. 사 먹는 커피는 탄 맛이 강하고 대체로 묽게 느껴진다. 그들은 태운 원두를 물로 희석시켜 내놓는다. 우리 부부는 약배전과 중배전을 선호하는 편이다. 원두 본연의 향미를 즐길 수 있다. 나는 커피와 얼음이 고루 섞이도록 글라스 컵을 한 손으로 들어 원을 그리며 살짝 흔들었다. 얼음들끼리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풍경소리처럼 맑고 경쾌하다.


남편이 과천에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남편의 커피를 한 모금 더 꿀꺽 삼켰다. 유튜브 검색창에서 임윤찬을 검색해 그의 반클라이번 콩쿠르 결선 영상을 클릭했다. 배경음악으로 콩쿠르에서 임윤찬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노트북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임윤찬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온몸으로 건반을 두드린다. 그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교하고 부드럽지만 강하고 아름답다. 자신이 해석한 곡의 느낌을 온 마음을 다해 관객에게 들려준다. 음알못인 나의 몸에서 본능적으로 전율이 인다. 곡이 마지막을 향해 달리다 마침내, 임윤찬이 악보의 제일 마지막 음을 누름과 동시에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흥분을 억누르며 숨죽여 그의 연주에 몰입하던 관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며 일어나 박수를 보낸다. 지휘자 역시 꾹꾹 눌러 둔 감정이 마침내 눈물로 새어 나오자 한 손으로 재빨리 그것을 훔쳐낸다. 십 수차례 반복 시청한 영상임에도 볼 때마다 내 가슴도 어김없이 부풀어 올라 울컥하기에 이른다.


글을 쓰기 전,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보며 늦은 아침을 아무렇게나 해 먹었다. 보고 싶은 영상을 보면서 먹고 싶은 걸 자유롭게 보는 호사를 누렸다. 강풀과 임윤찬과 독서와 글쓰기는 행복 호르몬을 부르는 완전한 조합이다. 남편의 커피는 직소 퍼즐의 마지막 피스로 주말 아침, 행복 퍼즐이 완성된다.


폰을 열어 키즈 카페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 남편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행운아' 이모티콘과 함께. 남편 역시 머리 위로 하트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들고 있는 브라이언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아이가 웃으며 노는 사진 몇 장과 함께. 남편이 보내온 볼 풀에서 아이와 누워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남편은 진심 아이처럼 키즈카페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두 아이의 방학 중 처음으로 혼자 보내는 귀한 시간이다.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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