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소설을 좋아한다. <생의 이면>을 비롯, 여럿 읽었지만 글로 남겨보지 못했다. 그의 단편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을 꺼내 다시 읽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어느 정도를 알고 '나는 그를 안다'고 말할까. 누군가를 어느 정도 알아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알 수 있기는 한건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정말 그 사람인가, 나는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본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는데 타인의 말과 행동의 단면만 보고 그를 안다고 나는 말 할 수 있나.
가끔 글을 쓰러 카페에 간다. 카페 갈 때 이어폰은 필수이다. 나는 음악으로 소음을 차단하는 편이다. 얼마 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뚫고 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내 귓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ㅇㅇㅇ은 정말 살림을 전혀 안 해본 사람"이라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화자 포함 셋이 한 테이블에 앉아 모임에 초대받지 못한 누군가에 대해 험담을 하고 있었다. 궁금했다. 살림을 해보고 안 해보고는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인가. 집 청소의 정도인가, 음식솜씨인가, 수납의 정갈함일까. 이야기 전체를 경청한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가 본 것을 타인에게 저렇게 자신있게 이야기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험담의 대상이 되었을까. 살림을 전혀 안 해본 분의 변을 들어보고도 싶었다. 그분도 사정이란 게 있을테니.
표제작 <모르는 사람>은 화자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머니는 터무니없게도 아버지가 젊은 여배우와 바람이 나 유럽으로 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을 거라 추측한다. 평소 어머니의 의심과 불평이, 억측과 무지가 아버지를 얼마나 옭아매었을까, 무척이나 힘들었겠나 생각했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11년 후, 한 선교사를 통해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접한다. 아버지는 그간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그곳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숨졌다고 그는 전한다. 아버지는 미래건설 회장의 사위이자 상무로 재직했으나 그 일과 삶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해 왔고 선교활동을 오랫동안 준비했었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이 견디기 힘든 삶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어머니와 아들에게서 떨어져) 원하는 삶을 살러 떠났던 것이다. "살고 싶은 삶을 살았으니, 네 아버지는 행복했겠구나, 하고 잦아드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말했다. (중략) 어머니가 견디고 있는 세상이 비로소 보였다."(p.37)
"평생 동안 다른 삶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남자와 한집에서 살아야 했던, 그러나 정작 자신은 그리워할 다른 삶이 없었던, 그래서 허전하고 화나고 숨 막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도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고 버둥거렸을 어머니의 삶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가장 모르는 사람이다." (p.36)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 그녀가 느꼈을 슬픔과 모멸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든 몸짓이었음을 소설 말미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삶을 한없이 견디는 어머니가 보였다.
우리는 모두 모르는 사람인 것만 같다. 오랫동안 함께했고, 관찰했고, 대화를 나누었다해도 타인의 속 깊은 마음, 진솔한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한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자만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