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평도 독후 감상문도 아니다. 소설작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소설을 써보고 싶어 여태 읽은 책 중 좋았던 책을 재독하며 인물이나 소재를 정리해 보는 글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소설은 2021년 출간되었고,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아름답고 명료하며 실리적인 소설"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분량이 짧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다. 키건은 24년간 단 4권의 책만을 냈다고 한다. 대단히 과작인데, 그만큼 인물과 배경과 플롯이 탄탄하다.
[소설 속 인물]
빈 펄롱은 빈 주먹으로 태어났다. 주인공을 설명하는 가장 첫 문장. 강렬하다. 빈 펄롱은 석탄, 목재상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며, 미시즈 윌슨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고용된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지역 사회의 편견과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한 그의 배경이 소설 말미에 그가 한 행동을 더욱 빛나게 한다. 평범한 사람, 혹은 사회에서 편견을 경험한 빌을 행동의 주체로 그려 독자들도 불의에 행동하기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그의 직업이 "가장 더러움을 타는 작업"(p.13)인 것도 좋은 설정이다.
미시즈 윌슨은 빈 펄롱을 돌보며 잔심부름도 시키고 글도 가르친다. 빈 펄롱이 약혼할 때 자리 잡는데 쓰라며 몇천 파운드를 주기도 한다. 비혈연 가족이지만 빈 펄롱이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않는 인간이 되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아닐까 한다. 그녀가 매일 보여준 사소한 것들이 쌓여 지금의 빈 펄롱이 된 거다.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p.120) 미시즈 윌슨은 막달레나 세탁소의 수녀들과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에 대해 함부로 말한 적도 없고, 네 엄마를 심하게 부리지도 않았어."(p.93)
사소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 요즘 머릿속에서 계속 굴러다니는 생각이다. 불꽃 튀기는 성취보다 매일의 소박한 행복을 볼 줄(느낄 줄) 아는 눈과 마음이 내게 필요하다는 것을.
미시즈 케호를 비롯, 아내까지 빌 펄롱이 본 것을 모른 척하라고 말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의를 알지만 이들처럼 수군대기만 할 뿐 침묵하지 않나. 수월한 침묵을 택한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p.57)
네드가 아버지였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미시즈 윌슨이 펄롱을 잘 보살폈던 것은 그가 혈연가족이기 때문이라 짐작되었는데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는 설정이다. 네드가 친아버지가 맞다면,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은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p.111)에까지 미친다.
빈 펄롱을 미혼모의 아들로 설정이 돋보인다.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만난 미혼모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와 닿아있다. 그것이 과거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는 일일수도 있고 미래 나의 딸을 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책이나 영화에서 미시즈 윌슨 같은 인물을 좋아한다. 악한 인간, 방관자적 인간들 속에 선한 인간도 반드시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일상에서도 선한 인물을 만났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 듯. 이런 인물을 반드시 설정하는 게 좋겠다.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이 있는 듯 보이지만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혈연 관계에 있는 미시즈 윌슨의 사소한 친절, 말, 행동, 가르침들이 어떻게 삶을, 사람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영화 <소울>이 떠올랐다. <퍼펙트데이즈>가 생각나기도 했고. 또 서로 돕지 않은 삶에 의미가 있는지, 돕지 않는 기독교인은 위선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서로 돕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시간적 배경]
크리스마스 시즌을 시간적 배경으로 두었는데,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p.103) 내기 좋기 때문 아닐까. 축제 분위기에서 소외되는 아이들과 크리스마스의 중심에 있는 수도원의 부조리를 더욱 부각한다.
키건은 소설 속 등장하는 인물이며, 풍경 속 단어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은 듯하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철저히, 콤팩트하게 녹여냈다. 이것이 짧은 분량에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 아닐까.
이야기는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문학적으로 재조명한 것이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아일랜드에서 운영되었던 기관으로 미혼을 포함한 여성들을 수용하여 강제 노동과 학대를 일삼았다. 무려 이 백 년에 걸쳐 존재했고 묵인되었던 비극이다. 수녀원에서 일어난 학대여서 그 부조리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에서 움츠러든 한 소시민의 결단이 돋보인다. 하성란의 <밤의 밀렵>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인간 행동의 부조리와 그것을 묵인하는 사회. 비슷한 주제를 이토록 다르게 표현하다니.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읽고 좋아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게 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매 순간의 장면이 그려지고 이야기의 흐름이 탁월하며 인물의 내적 갈등이 잘 묘사되어 영화를 보는 듯했고, 역시 영화로도 개봉되었다.
펄롱은 비극을 보고도 소녀를 내버려 두고 나온 자신이 위선자처럼 느껴져 괴로워한다. 나 역시도 내가 위선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고 그때의 나를 혐오해 왔다. 잘못을 인지하나 쉽게 행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빈 펄롱의 용기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아이들에게 그 해가 미칠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빈 펄롱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멸적 용기를 갖기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빈 펄롱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에게서 위안을 얻게 된다. 세상엔 이런 인간도 있을 거란 기대를 하게 되고. 이것이 내가 소설 읽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책 속 발췌]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p.99)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 103)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119)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