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탈해서 감사한 하루들

by 핑크리본

미즈무라 미나에 소설 <어머니의 유산>을 읽고 있는데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보물 1호'라 저장된 큰 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거절과 통화 사이 동그란 검은 버튼을 통화 쪽으로 살짝 밀어 전화를 받았다. 아이는 방과 후 수업 전 친구들과 저녁으로 먹을 떡볶이를 배달시켜 놓고 기다리는 중 나에게 전화했다고 말했다. 아이의 옆에서 친구들의 웅성거림이 들렸고, 친구들은 아이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거나 큰소리로 장난 섞인 말들을 쏟아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 ㅇㅇ의 여자친구인데요." 키득키득.

"어머니도 저녁 맛있게 드십시요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이들은 연신 킥킥댔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걱정이랄 게 없었고 세상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고작 해봐야 실수로 틀린 시험 문제가 아깝고, 공부가 다 안된 상태로 시험날 아침을 맞았을 때의 긴장이 다였으니까. 아이들을 웃기려고 과장된 몸짓과 말투를 썼고, 아이들이 박장대소를 하면 뿌듯하던 그때가 내게도 있었다. 그 시절을 살고 있는 어린 내가 문득 그리웠다.


둘째는 감기기운이 있어 결석을 했고 따뜻한 방에서 온종일 아이패드로 제 좋아하는 캐릭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끔 유튜브를 보는지 킥킥 소리가 들린다. 어제 오후 남편과 둘째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미세먼지 탓에 하늘이 뿌얬지만 날은 따뜻했고 신선한 바람이 간간이 얼굴을 스쳐 마음이 울렁였다. 온도가 23도로 올라가자 우리 모두는 남편이 준비해 온 가방에 겉옷을 벗어 쑤셔 넣었다. 우리 셋의 겉옷이 가방을 꽉 채웠다. 가벼운 겉옷이었지만 가방이 두껍게 부풀어 올랐고 두터운 가방을 멘 남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무거운 짐을 메고 산책이 될까. 당연한 듯 짐은 남편이 짊어졌는데 그게 어제따라 사뭇 신경 쓰였다.


동네를 벗어나 길게 뻗은 오르막을 한참 걸으니 꽃집이 줄줄이 늘어선 거리가 나왔다. 꽃집들마다 형형색색의 꽃이 심긴 크고 작은 화분들이 가게 안을 채우고도 모자라 문 앞에 빼곡히 줄지어 나와 있었다. 사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해가 잘 들지 않는 우리 집에 내 눈 호강하자고 생명을 쉬이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찻길 건너에도 꽃집이 줄지어 있어 길을 건넜다. 모종을 파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가족은 다음 주부터 주말농장을 시작한다. 생애 첫 농장이 될 터이다. 무엇이 있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종을 살폈다. 양파, 대파, 상추. 셀러리도 있었고, 케일도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채소 모종이 한가득 있었다. 앞으로 며칠간 봄에 잘 자라는 작물을 공부할 예정이다. 내 손으로 싱싱하게 가꾸어서 남김없이 건강하게 먹을 거다. 봄이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엄마의 생대구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