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혜화동은 종로구와 성북구가 만나는 지점으로 인쇄 페이지가 구석이라 간혹 생략되기도 했다. 그랬던 것이다.
게다가 실제 혜화동이 주는 상실감이란, 하! 동물원아저씨에게 감성을 도둑맞았다.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엔......"
아 놔~JS빌딩 앞 횡단보도에서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광활하다.
졸업전시회를 끝내고 간만에 동기들과 혜화동으로 놀러 나간 날이다. 2번 버스를 타고 성대 앞 정류장에 내려 마로니에 공원 쪽으로 가고 있는데 아는 사람 한 명과 마주쳤다.
"효임당~어, 어디가?"
수능과 기말고사를 모두 마친 고3 교실은 그야말로 무풍지대다. 등교를 하는 건 맞는데, 학교에서 할 게 없으니 읽을 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밤새 그림을 그리는 관계로 4교시 내내 엎드려 잤다. 교시마다 선생님들께서 자꾸 깨우신다. 갖고 온 책을 읽으라고.
'어젯밤 제가 그림을 몇 장이나 그린 줄 아세요?'
지금 우리 반에서 입시 준비가 끝나지 않은 사람은 딱 둘이다. 바로 논술을 준비하는 효임당과 실기시험을 준비하는 나.
"너 여기 다녔어?"
졸업을 할 때가 다 되어서야 만나다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성북구에는 대학이 참 많다.
강릉에 내려갈 거라고 했다. 나는 힘들게 올라와서 내려가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강릉이 좋다고 말했다.
잠깐 나는 갈등했다.
1997년 11월 어느 날.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이었고 곧 IMF가 닥치기 직전이었다.
무엇을 위해 난 서울에 왔을까?
며칠 뒤, 강남 고속버스 지하상가다.
강릉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려고 지하철 개찰구를 금세 나왔는데, 또 다른 아는 사람 한 명을 만났다.
우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우연히 길에서 만났고, IMF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워지는 관계로 특별한 질문을 서로 하지 않았다.
나중에 MARI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이며, 친구의 깊어진 눈동자가 아주 인상적이긴 했다.현재 로마에서 유학 중이시라는.
"자매님, 어디 가세요?"
나는 항상 글을 쓰고 싶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다.
중학교 때 배웠던 피천득 선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라는 글에는 선생이 좋아하는 것들이 잔뜩 나열되어 있다. 남편은 자기는 '인연'만 알지 그런 수필은 들어본 적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나보다 더 미대생 같은 감성의 소유자이시다.
당시에는 상당히 이상한 글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선생이 '포오마이커 책상'을 이야기할 때, 글씨도 그렇지만, 나름의 음률로 읽어야 할 것 같은, 그래서 좀 독특했던 기억이 있다.
오십을 앞둔 나이가 되니, 선생의 글이 백 분 공감된다. 나 역시 같은 의도로 지금의 글을 썼으니까 말이다.
개학 직전 마지막 kite surfing이라 사람이 가득
아마 우리가 더 친했으면, 그날 라라랜드 허모사비치로 가자고 했을 것이다.
만날 때마다 어색한 건 사실이었지만, 미국아재를 만나지 않았으면, 그날 나는 시누이 교회 여름 성경학교에 가야 했다. 어떻게든 만나야 했다.
LA여행에 앞서 엄마가 들기름 10병을 준비해 주셨다. 아는 분이 농사지으신 걸 직전에 짜서, 한 병 한 병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태평양을 건넜다. 그중 한 병과 조작가 한정 소주잔을 미국아재에게 선물로 줬는데, 음, 좀 시골스럽긴 했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겉으로 말하는 편이지만, 미국아재는 생각하는 것을 속으로 두는 편이다. 그래서 속을 알 순 없지만, 큰 의도가 있어 보이진 않다.
나에게 글쓰기 권유를 했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기억이 잊혀지기 전에 기록을 좀 해두는 게 어때?'라는 말 한마디에 내가 하고 싶어서 실전으로 옮긴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어떤 순서대로 나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글을 잘 쓰냐 못 쓰냐, 재미있냐 재미없냐로 나뉠 수 있다는 것에 생각 외로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은 나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일찍이 알려주셨다. 큰 용기가 되었다.
가끔 내가 기억하는 여러 장면들 속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국아재도 그림자처럼 다 지켜보고 있었을 꺼란 느낌이 있다.
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말고, 화면 어디에선가 꼭 자리하고 있는 사람.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다.
"야,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너 수능 몇 %야?"
나도 참 웃기긴 하지. 마흔을 훌쩍 넘어서도, 수능점수가 궁금하니 말이다.
"난 3%인데, 예체능이긴 하지만. 야, 너도 3%야?"
여기선 낮은 목소리로 읽어야 한다.
"아니(천천히), 1%인데."
나는 그날 이후 어느 누구에게도 더 이상 수능점수를 물어보지 않는다.
순자선생님께서는 절대 울지 말라고 하셨다.
옛날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졸업생들이 눈물을 보였지만, 너희들은 그럴 일 없으니, 절대 울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나 역시 선생님 말씀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굳이 울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졸업식 노래가 조금씩 흘러나오니, 친구들이 하나둘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자연스럽게 눈물이 났다.
사실 나는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일주일 결석을 했다. 그래서 6년 개근이라는 명예를 얻지 못했는데, 어쩌면 그것 때문에 눈물이 난 것일 수도 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매일약국 골목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어떤 사람을 봤다.
분명 우리 동창인데, 중간에 전학 온 친구였던 거 같은데, 오토바이를 타고 물건을 배달하는 모습이었다. 한 눈에도 저 애는 중학교에 다니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 나이 14살, 사회 전선에 뛰어든 동창이라니......
두고두고 많은 생각을 했다.
- 글을 마치며 -
'내가 기억하는 영동 국민학교 이야기'속에 등장한 모든 동창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시점이라, 오류도 있지만, 글 쓰는 내내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행복했습니다.남편이 다음 편은 중학교 이야기냐고 물어봤는데, 두 번은 없습니다. 이 글이 '불후의 명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