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윳값 3300원을 내면, 200원이 남는데, 100원만 방방이를 타고 100원은 남길 것이다. 거스름돈을 남기지 않으면 양심에 찔릴 것 같았다.
거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람들은 내가 방방이를 타다 붕~날아서 떨어진 거라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자세히 말해본 적이 없는데, 진실은 중심을 잡으려고, 방방이 끝 부분을 디뎠다가 미끄러져서 떨어진 것이다.
아마, 팔로 집지 않았다면, 머리를 다쳤을 거라는 게 의사 선생님 말씀이셨다.
간혹 고층에서 떨어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떨어지는 순간 선명하게 본 어떤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나 역시 사고의 순간에 느릿하게 지나가는 행인이 두 명 있었고 '아, 내가 떨어지는구나!' 하는 느낌으로 장면을 기억한다.
직감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뭔가 나에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운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님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교문에서 구름 떼처럼 몰려나왔다.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며칠 후, 나는 병원에 입원을 했다. 수술 전날, 담임선생님께서 친구들과 함께 병문안을 오셨다. 그때 홍반장이 온 게 기억난다.
저 애는 내가 궁금해서 온 건지 병원이 궁금해서 온 건지 뭐가 궁금해서 온 건지 정말 궁금했다.
수술 다음날, 나는 아픈 것은 둘째치고 잠이 쏟아졌다. 어제까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친구들도 만나서 나쁜 게 하나도 없었는데...... 뭔가 몸이 점점 이상해진다는 걸 느꼈다.
나는 꿈에서 봉봉이와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다. 몽롱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는데, 누군가 병실로 찾아왔다.
변아이유는 내 오른손을 꼭 잡고 울먹울먹거렸다.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아주 오랫동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잠에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는데, 나를 보고 울먹거리는 친구를 메몰차게 대할 수가 없었다. 약간 열도 나는 것 같고, 몽롱해지는 것 같아서 이불로 얼굴을 덮었는데, 내 속도 모르고 변아이유는 자꾸만 덮은 이불을 걷어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5학년 때 변아이유가 유성 슈퍼 앞에서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자동차에 부딪혀서 붕~날아서 몇 미터 앞에 떨어졌는데, 다행히, 하나도 다치지 않고 약간의 타박상만 입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동인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셔서 여자 친구들 몇 명이 병문안을 갔는데 사실 우리가 병문안을 간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당시 동인병원에는 강릉에서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병실 문을 여는 순간, 하얀 벽과 하얀 침대. 약간의 두려움 같은 복잡 미묘한 감정 때문에 왈칵 울음을 쏟았다. 내가 눈물이 많은 타입이 아니라서, 변아이유가 그때 감동받았던 걸까?
잠시 후, 언제 눈물을 보였던가 싶게, 우리의 숨은 목적을 위해 행동에 들어갔다. 절반은 걸어내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고, 절반은 윗 층에서 기다리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뭐 이런 식으로 계획을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병문안을 온 또래의 타학교 남학생들이었다. 그 애들도 어디서 엘리베이터 소식을 들었는지, 암튼, 우리의 목적을 꽤 뚫고 있다가 막아서는 것이었다.
어찌어찌해서, 나는 내려가는 그룹이었고, 휠체어를 탄 환자분을 부축하는 척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지켜보던 남학생들은 애매한 상황이라 내게 꼬투리를 잡지 못했고, 그날 병문안을 간 사람 중 나와 한 명의 친구만 엘리베이터를 탔다.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뭔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우리 부모님은 엄격하시지만, 개방적이시다. 물론 아빠가 경찰이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정의롭고, 비교적 모범적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의 가장 큰 장점은 벌어진 일에 대한 후회나 원망이 없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사고는 벌써 일어났고, 잘잘못을 따져봐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으니, 다그치기보다는 상황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쪽이다. 그래서 내가 팔을 다친 것에 대하여 가족 누구도 나에게 핀잔을 주지 않았다.
바야흐로 고3 수능-100일. 백일주를 마셨던 날이다. 우리는 수능을 2차례 본 전무후무한 수능 1세대이다.
나는 여고에서 '문학회'에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목련'이라 불렀고, 주로 시를 쓰는 활동을 했다.
사실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무형식의 형식, 신변잡기적인 수필이었지만.
나의 감성은 남들과 살짝 색깔이 다르다고 할까? 아무튼 4대 1의 높은 경쟁률로 보아 여고에서는 나름 인기 있는 써클이었다. 양대산맥으로 '목련춘추'가 있고, 학교신문을 만드는 써클로 조MARI기자와 여브레인이 활동했다.
그날 밤 우리는 '감자바우'에서 공식 모임을 가졌다. 큰 방이미닫이로 나뉘어져 있었고, 후배들이 그중 하나를 예약했고, 약간의 감자전과 옹심이를 신제품 청하에 곁들여 먹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예약을 받은 식당 주인이 측근인가 싶을 정도로 물 흐르듯이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이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어찌 된 일인가? 미닫이 너머에서 보리밭이 울려 퍼진다. 그것도 남학생들의 중창으로, 내 평생 그렇게 중후한 보리밭은 처음이었다. 왈칵은 아니지만, 가슴이 찡~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는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우리도 답가를 불러주었다.
"내 작은 머리로는 알 수 없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건지......" <나의 길은> 하광훈
방 안에는 감동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다.
다음 날, 교장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사연인즉슨, 우리가 백일주를 마시던 그곳에서 하필, 경고 여선생님들 모임이 있었던 것이다. 홀에서 식사를 하시던 선생님들에게는, 방 안에서 강고는 보리밭을 강여고는 가요를 부른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사실, 그날 미닫이문을 열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 않겠다. 우리는 모두 순수했으며, 물론 술을 마시긴 했지만, 그 누구도 선을 넘지 않았으니까.
결국 우리 문학회는 일주일 근신 처분을 받았다. 생활기록부에 빨간 줄이 그어지진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담당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그날 밤, 미술학원으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아빠가 당장 집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울면서 택시를 탔고 기사분도 이상하셨는지, 침묵만 흘렀다.
아빠는 자초지종을 얘기하라고 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후, 아빠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도 농고 다닐 때, 아리랑 써클이라고 친구들 모임이 있었는데, 충분히 내 상황을 이해하신다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며, 나를 다시 미술학원으로 데려다주셨다. 상황종료.
나는 방긋 웃는 얼굴로 다시 학원 문을 열었다.
그 후, 나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영동지구 실기대회에 나가 동상을 받고, 학교 대표로 춘천에서 열린 도 대회에도 나가 장려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