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 손이 까맣게 변해버렸다.
4B연필은 부드럽지만, 손 등 얇은 주름 사이에도 연필심을 물들일 만큼 강력했다.
새끼손가락을 마치 컴퍼스처럼 종이에 대고 섬세한 부분에 포인트를 주는데, 손가락을 대면, 연필심이 도장처럼 찍히기 때문에, 손가락을 구부려서 손톱 부분을 이용해야 한다. 부득이하게 날마다 종이에 손톱을 문지르다 보니, 손톱이 자랄 여유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아야 새끼손톱이 자라날까?
그래도 그 시절,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으로 나는 정말 행복했다.
친구들과 같은 길을 걷다가 나 혼자만 새로운 문을 열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그전까지 공부를 하는 것도 힘들고,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정의할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그저 사회책에 나오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이런 거구나 어렴풋이 짐작만 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느낀 점은, 고1 아들 역시 내가 겪은 비슷한 고민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과거가 아들의 현재로 공감이 되는 시점을 발견하고 나니, 갑자기 아들이 더 막 좋아졌다.
내가 새로운 문을 열고 다른 세계로 이동한 것처럼, Yoon도 그 무언가를 곧 발견하길 기대해 본다.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할지 몰라서, 가장 익숙한 연필을 골랐다.
Note에는 만년필, 샤프, 연필, 붓펜 등의 몇 가지 도구가 있다. 그래도 연필이 최고다. 특이하게 연필로 선을 그을때, 사악 삭~소리도 난다. 오우, 기술력 짱이다.
나는 처음에 아주 가는 연필을 선택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1단계 스케치를 대략적으로 하고, 2, 3단계를 거쳐 그림을 그린다. 마무리는 꼭 지우개를 이용해서 라인 정리를 꼼꼼하게 한다.
그래서인가? 초반에 그린 그림을 보면, 똑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10kg 정도 다이어트가 되어있다.
처음 형태를 잡을 때는 비교적 넉넉하게, 그리고 하나하나 깎는 느낌으로 정밀묘사를 하는데, 나는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가며 하는 작업이 마음에 든다.
그가 충분히 잘생긴 사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나이를 먹어서 새로운 일을 도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Note가 아무리 신문물이라 하더라도 나는 내 몸이 기억하는 클래식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지만, '저는 Note로 그림을 그리는 데요. 이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물어볼 수도 물어볼 데도 없다.
미술학원의 첫날처럼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데로 그릴뿐이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Web Designer라는 핫한 직업이 등장했다.
나는 영화 '접속'처럼 천리안으로 친구와 채팅하던 사람이지만, 접속만 알지 다른 컴퓨터 작업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다. 아마 내가 취미가 있었으면, 당연히 흙 따위는 쳐다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뭔가 굉장히 잘 그려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번 스케치를 하지 않았는데도, 뭔가 그림이 막 되는 분위기였다.
우리 가족은 외출 준비를 하던 중이었고, 나는 기다리는 동안 잠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잘못된 지우개질을 해버린 것이다. 화면은 금세 백지로 돌아가고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헉, 이런 기능이 있었어?'
지우개는 획과 영역을 지우는 두 가지만 있는 줄 알았다. 손글씨 모두 지울 수도 있다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밤새도록 보고서를 썼는데, 잘못된 클릭 한 번으로 한순간에 눈앞에서 날아간 경우다. 20대의 나였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 하얀 백지만이 나를 향해 방긋 웃음을 보인다.
한글 프로그램을 보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라는 아주 멋진 메뉴가 있다. 몇 번이고 내가 제목을 바꾸거나 내용을 바꾸어 무궁무진하게 사용할 수 있다.
Note의 경우는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면, 거기서 끝나 버린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한마디로 PDF.
반면에 Note는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저장하기와 상관없이 원본은 항상 진행 중이다. Always alive.
원본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검은색 옷이 맘에 안 들면, 다음 날 빨간 옷으로 갈아입히면 된다. 다만, 다시 예전의 그 검은색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2단계에서 멈춘 그림만 갖고 있고, 3단계 도중 작렬한 죽음을 맞이하여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날이 '운수 좋은 날'이었다.
끝내 전하지 못한 편지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