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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A Sep 06. 202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

"몰리에르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어. 유대인들이 쓰는 모자처럼 생겼고. 자! 이 그림에서 보이지? 그럼, 그려봐~"

우리 화실 몰리에르는 무슨 연유인지

뒤통수가 깨져 있었다.

옛날 미대입시 뎃생은 소형석고(비너스, 아그리파, 쥴리앙)를 그렸다.

하지만, 국민대는 유일하게 중형을 그려 실기시간 4시간, 종이는 2절이었다.

쉽게 말해, 대부분 3시간, 3절에 기본석고를 그리는데, 국민대만 전형이 다르다는 얘기다.

화실에서는 나 한 명을 위해 석고상을 준비할 수 없으니,

저 귀퉁이 구석에 있던 오늘의 주인공 몰리에르 님을  

깨끗하게 목욕시켜 형광등 아래 꺼내놓은 거지.

#2

나는 유난히 이 석고상을 좋아했다.

그의 곱슬머리와 스카프를 그릴 때,

머리카락의 덩어리감과 스카프와 목 사이에 생기는 공간감이 좋았다.

물론, 그의 콧수염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하나하나 정복해야만 하는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었다.


1994년 1월 7일.

실기장 문을 연 순간,

내 눈앞에 둥근 모자를 완전한 몰리에르가 있다.

그 누구도 가능하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리라 생각지 않았던 시절.

나는 그렇게 차석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고3 때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얘길 하면

Yoon은 언제나

엄마는 예체능이라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야! 나도 안다고 내가 미대생인걸. 하지만, 나도 고3이었거든!)


종이에 뭉개져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새끼손가락 손톱을 보면서, 

내가 대학생이 되면, 손톱이 자라날까 의심했던 순간,

(부분 묘사를 할 때 손가락으로 짚으면 연필자국이 남아 손톱을 콤파스처럼 찍는다. 그러다 보니, 손톱이 자랄 틈이 없다는 얘기)

손등에 박힌 연필가루를 보면서, 

내 손이 본래 하얀지 검은지 분간할 수 없었던 순간.

이 모든 것이 다 어우러져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가장 노동집약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김환기 선생님은 한국을 떠나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한 점, 한 점 그림을 완성하셨다고 한다.

커다란 캔버스에 작은 사각형을 그리고 푸른 점을 하나씩 채운다.

수천, 수만 개의 푸른 점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들이 녹아들어 간다.

나는 이 점이 참으로 좋다.


지금의 Yoon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단 하나

언젠가 마주앉아 이 시절을 돌이켜 볼 때,

'참, 아름다웠지.'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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