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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무으야우 Sep 25. 2023

제주 1일 차 기록

제주 1일 차

1. 알림은 오전 4시였다. 그리고 눈은 3시 50분에 떴다. 사실 오랜만에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는 거라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4시 반에는 집에서 나서야만 한다. 새벽 공기를 뚫고 공항리무진버스를 타러 나왔다. 버스 시간이 변동될까 무서워 예상시간보다 20분을 일찍 나왔더니 새벽 5시가 되지 않았는데도 부지런한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오면서도 이게 맞나란 생각을 했다. 나 정말 제주 가나. 이런 생각.


2. 버스는 예상시간에 도착했고, 공항에 도착했다. 소지품 검사를 위해 줄을 서는데, 너무나 혼잡했다. 게이트는 곧 열리는데 나는 아직 출국장에 입장도 하지 못했다. 너무 긴장되었다. 이러다 제주에 못 가면 어쩌지?


3. 다행히도 6시 5분에는 도착했다. 그렇게 6시 20분 비행기가 제주로 떴다. 난 보통 비행기에서 잠을 잘 자는데 옆에 애기 두 명의 첫 비행기 탑승 이슈로 그 들뜸의 시끄러움을 듣느라 잠을 전혀 자지 못했다. 오랜만에 탄 비행기가 반가웠다. 맞다. 먼 곳으로 떠나려면 비행기의 소음이 있었지. 이륙 준비 중인데 지금 당장 이륙이라며 소리치는 애기 두 명의 소리와 미친 듯이 진동하는 비행기의 소음이 버무려져 여행의 시작은 꽤 피곤한 거란 생각을 했다.


4. 친구가 마중을 나와준 덕분에, 편하게 공항을 벗어났다. 그리고 간 곳은 앤트러사이트 한림점. 플랜테리어가 인상적이었고, 따뜻하게 마신 커피와 말차팥 스콘이 맛있었다. 폐공장을 개조한 카페였는데, 9시부터 여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고, 같이 간 친구도 플랫화이트가 너무 맛있다며, 그리고 카페의 분위기도 좋다며 만족스러워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카페가 꽤 넓었다. 주변을 돌아다녔고, 시간 맞춰 한림항으로 갔다.


5. 한림항에서 비양도 가는 배를 탔다. 비양도.. 비양도.. 마치 프랑스어 같이 느껴졌다. 날이 흐려 배가 뜰까 걱정했는데, 배는 출발했다. 15분 만에 도착했고, 자전거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돌았다. 30분도 안 걸린다 했다. 자전거를 타고 해안가를 돌았다. 구멍이 뻥 뚫린 검정 현무암. 진한 파란색 바다 그리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한 무성한 풀들. 검정, 파랑, 초록만이 존재했다. 이제야 내가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전거의 페달에 묻은 기름때로 바지는 더러워졌지만, 페달을 밟으며 왼쪽은 검정과 파랑, 오른쪽엔 푸른 초록이 가득한 이 풍경이 눈물 나게 좋았다. 등대까지도 걸어 올라갔는데, 땀은 꽤 났지만 상쾌한 땀이었다.


6. 점심으로 고기국수를 먹었다. 원래 가려던 곳 사장님이 병원에 가셔야 한다며 문을 눈앞에서 닫으셔서.. 급하게 찾은 곳이었지만 참 맛있었다.


7. 오설록 티뮤지엄을 방문했다. 원래 수풍석 박물관에 가고 싶었지만, 예매 필수에, 이미 마감이었다. 아쉬움에 연락도 해보았지만 불가. 오설록 티뮤지엄은 관광객 천지였다. 섬에만 있어서 그런지 사람이 참 없어서 좋다 생각했는데, 제주에 있는 사람은 다 여기 있는 듯했다. 그냥 지나쳐서 이니스프리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제 일어난 지 12시간이 넘은 시간이었다. 극도로 피곤해져서 숙소에 체크인하러 갔다.


8. 숙소는 급하게 잡은 게스트 하우스였다. 훌륭한 시설은 아니었지만, 혼자 3인실 방을, 화장실과 샤워실을 혼자 쓸 수 있어서 좋았다. 가자마자 씻고 눈을 좀 붙였다.


9. 일어나서 저녁 겸 술을 마시러 친구와 다시 만났다. 친구의 게스트 하우스까지 걸어갔는데 오랜만에 불이 거의 안 켜진 어둠 속을 걸었다. 서울이라면 이런 길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너무 어두워서 핸드폰 조명에 의존을 하며 걸었다. 시골 한복판에 나는 걷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내가 나아가고 있는지 좀 헷갈렸다.


10. 처음 간 술집은 헌팅 위주의 술집이었다. 나와 친구는 너무 편한(?) 등산 마니아 같은 복장으로 구석으로 안내받았다. 물론 헌팅을 당하고, 혹은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지만, 등을 구부려서 파스타를 먹고 싶진 않았다. 파스타에 칵테일 한잔만 마시고 나왔다.


11. 그리고 찾은 술집까지 20분을 걸었다. 협재해수욕장까지 걸었는데, 아뿔싸. 닫았다. 점심 식당, 수풍석 박물관 그리고 술집까지. 덥석 가면 거의 열지 않았다. 조금 실망한 채로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불이 켜진 양식 레스토랑을 발견했고,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어서 밖에서 간단한 술과 스낵 주문만 가능하냐 물었다. 우리는 이 식당과 전혀 맞지 않은 옷차림으로 당당히 입장했다. (사실 당당하지 않았다. 당당하고 싶었다.) 


12. 와인을 각자 세 잔씩 마시고, 봄나물을 곁들인 감자전을 먹었다. 친구가 예전부터 목 넘김이 좋은 레드와인을 그렇게 찾았는데, 그걸 여기서 찾았다! 둘 다 와인을 홀짝 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적을 수는 없지만, 마음 저 깊이 몇 번의 열쇠를 잠가두려 했던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어서, 그리고 그 이야기에 곁들인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좋은 마무리였다.



13. 그렇게 기절. 제주에서 첫날은 무척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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